반메 작가의 ‘바람’은 레진코믹스가 주최한 제3회 레진세계만화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부터 1602년(선조 35)까지이고, 공간적 배경은 조선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장르가 판타지와 무협이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때로는 까마득한 전생의 시간에 가 있기도 하고, 때로는 지구의 생태계가 아닌 우주공간에 가 있기도 한다. 판타지는 마법과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이야기이고, 무협은 무예에 능한 협객의 이야기인데, 이 작품 속에서 판타지나 무협이라는 장르적 특성은 결국 불교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작품의 최고 장점은 캐릭터 설정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작품은 구미호 설화에서 차용한 꼬리가 둘 달린 여우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이 여우를 감싸준 까닭에 파혼을 당한 양반 자제가 출가를 결심한다. 스님이 임진왜란에 승병으로 참전하자 문수라고 불리는 여우는 동자승으로 분신해 사찰을 지키게 된다. 10년이 지난 뒤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도사 제철과 돗가비인 납이 반목하면서 이야기는 급전된다. 납이 주변의 산야를 불로 태우자 제철은 납을 호수로 유인한다. 문수도 사찰까지 태울 기세로 번지는 불길을 막고자 밖으로 향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철이 납을 유인한 호수의 바닥에는 천계의 천신들에 의해 적류의 우두머리가 갇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제철이 불을 끄는 과정에서 호수 바닥에 봉인된 덫이 부서지고 적류의 수장도 탈출하게 된다.
천계의 천신들은 제출과 납에 대한 심판을 하는데, 촌로(村老)의 인상을 지닌 은암이 나타나 천신들의 심판을 만류한다. 그리고 은암은 납이 산하를 다 태울 기세로 불을 뿜은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납의 몸에는 2008명 고혼의 원한이 쌓여 있는데, 이 원한의 원흉이 제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근원적인 해결책은 납의 몸에 갇힌 고혼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이상이 작품의 상반부 줄거리이다.
이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이 각기 업보에 따라 윤회한다는 설정은 불교의 십이연기설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작가가 “천신들이 대화하는 장소는 우주공간”이라고 밝힌 것에서 알 수 있듯 천신들이나 수라들의 세계는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실재한다는 점에서 중관학(中觀學)에서 말하는 진공묘유의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 속에는 지옥, 축생계, 인간계, 천계, 수라계, 중음계 등의 세계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불교의 육도윤회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육도윤회설의 세계는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도 순으로 각자의 선업과 악업에 따라 향상(向上)과 향하(向下)하는 반면, 작품 속의 세계는 천계의 천신들로 대표되는 선과 수라계의 적류(迪流)들로 대표되는 악이 반목하면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서양의 판타지 소설에서 보이는 선악의 구도를 일부분 차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응오 소설가 arche442@hanmail.net
[1520호 / 2020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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