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3칙 운암유산(雲巖遊山)
4. 제3칙 운암유산(雲巖遊山)
  • 김호귀 교수
  • 승인 2020.01.28 13:47
  • 호수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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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아닌 지혜는 건혜지(乾慧智)일 뿐”

지혜이자 깨침의 도구인 칼
칼의 소리가 본성이었다면
물건 베는 시늉은 칼의 작용

약산이 운암과 함께 산길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허리에 차고 있던 칼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운암이 물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약산이 칼을 빼어들더니 갑자기 칼날로 무언가를 베는 시늉을 하였다.

약산유엄(藥山惟儼, 745~828)은 호남 석두희천의 법을 잇고 풍주의 작약산(芍藥山)에서 선풍을 진작하였다.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은 석문(石門)에서 출가하였다. 처음 백장(百丈)에게 참문하여 입실하였으나 백장의 배려로 약산에게 참문하여 그 법을 이었다.

본 문답은 약산이 운암을 데리고 산길을 유람하면서 주고받은 내용이다. 산길을 다닐 때면 필수품 가운데 하나가 칼이었다. 약산은 가장 흔히 언급되는 물건을 어떻게 다루고 또 어떤 의미로 활용하는가 질문하여 그것을 선기(禪機)로 승화시키고 있다. 칼은 운암의 지혜이고 깨침이다. 깨침은 모든 사람에게 애초부터 완전무결하게 구비되어 있다는 본래성불을 주장하는 것이 소위 조사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런데도 그런 도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스승은 제자에게 그것을 지적하여 자각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일상에서 언제나 대면하는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며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질문한다. 제자로 하여금 당금의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깨어 있는 삶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제자는 평소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깜냥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여 스승으로부터 점검을 요구한다. 달리 경전을 통해서 답변을 찾는다든가 스승으로부터 힌트를 요구하기보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어 평가받는 것이다.

약산은 이제 운암에게 그와 도리를 일깨워주려고 문답을 걸었다. 칼은 무쇠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산길을 가다가 나무나 바위에 닿으면 쇳소리가 난다. 깨침의 지혜는 언제나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약산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일부러 바위에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것을 그저 칼이 부딪치는 소리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어떤 행위로 드러내는지 곧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야말로 곧 약산이 운암에게 기대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약산은 운암에게 의도적으로 ‘그대는 칼이 내는 소리를 듣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리고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이 칼을 흔들어 보였다. 이미 칼의 소리를 듣고 있었느냐 하는 제스처였다. 나아가서 칼이 내는 소리를 인식할 것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 그 칼의 작용에 대한 답변을 촉구하였다. 그래서 약산은 칼의 본래작용 곧 물건을 베고 자르는 시늉을 보여주었다. 칼의 소리가 칼의 본성이었다면 물건을 베는 시늉은 칼의 작용이었다. 지혜는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천으로 승화되지 못한 지혜는 건혜지(乾慧智)일 뿐이다.

어느 날 약산이 운암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그대는 사자를 잘 데리고 논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운암이 대답하였다. “예, 사실입니다.” “그러면 사자를 데리고 노는 재주가 몇 가지나 되는가.” “여섯 가지입니다.” “그래, 나도 그대처럼 사자를 데리고 놀 줄은 안다만 재주는 다르지.” “화상께서는 몇 가지 재주가 있습니까.” “나는 딱 한 가지뿐이다.” “그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재미있게 노는 것이지.”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 하나가 곧 저의 여섯 가지이고, 저의 여섯 가지가 곧 하나입니다.” “그렇지, 사자를 잘 데리고 노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데리고 노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사자유희의 문답은 반야지혜를 활용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것을 육바라밀로 실천하는 것과 대자비심으로 드러내는 것이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운암은 대번에 약산의 말에 수긍을 하고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 그 한 가지와 여섯 가지가 다름이 없음을 말씀드리자, 약산은 운암을 인정하였다. 스승과 제자가 의기투합(意氣投合)하는 것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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