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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 전 본래면목으로 가리라’ 봉주 스님 영결·다비식 봉행

  • 교계
  • 입력 2020.01.29 19:04
  • 수정 2020.01.30 19:44
  • 호수 1523
  • 댓글 0

1월29일, 영천 만불사서
사부대중 500여명 동참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과 해인사 주지 등을 역임한 영천 만불사 조실 망우당 봉주 스님이 마지막 남은 법구마저 지수화풍으로 돌리고 무생의 세계로 떠났다.

지난 1월23일 법납 71세, 세납 84세로 입적에 든 봉주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이 1월29일 오전 11시 영천 만불사에서 봉행됐다. 원로의장 세민 스님을 비롯해 오등선원조실 대원, 해인총림방장 원각, 해인사주지 현응, 은해사주지 돈관 스님과 주호영·김부겸 국회의원, 이철우 경북도지사, 최기문 영천시장 등 사부대중 500여명 동참해 스님의 법향을 기리며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만불사 인등전에서 봉행된 영결식은 명종 5타에 이어 영결 법요, 행장 소개, 영결사와 법어, 추도사, 헌향, 추모공연 등의 순으로 봉행됐다.

조계종원로회의 의장 세민 스님은 영결사에서 “일의일발은 스님의 한평생 살림살이였고 버리지도 구하지도 않는 것이 스님의 가풍이었다”고 회고하며 “항상 온화하면서 후덕하고 깨어있는 서슬 푸른 기상과 불조에 얽매이지 않는 대방무외한 선지를 지닌 눈밝은 선지식이었다”고 스님의 덕을 찬탄했다. 세민 스님은 “이제 스님의 이사에 걸림 없는 모습과 대방무외한 선지를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현하며 “여기모인 대중의 비원을 들으시고 사바의 인연을 맺어 우리 곁에 오셔서 다시 한 번 불일을 밝히고 조계의 선풍을 드날리시기 바란다”고 염원했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오등선원 조실 대원 스님이 대독한 영결 법어에서 “일생을 수행자의 본분인 정진으로 일관하였음에 이제 육신은 낡은 옷을 버리듯 내려놓았으나, 주인옹은 여시임의자재하니 어디 사바를 등지고 적멸에 들었다 하리오”라며 “종사께서는 교계정화불사에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헌신하며 오늘날 우리 종단의 본래면복을 찾도록 하였다”고 애도했다.

해인총림방장 원각 스님은 추도사에서 “설령 해와 달이 다시 지고 뜬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종사께서도 그저 오고가는 도리를 자비심으로 보였을 뿐”이라고 추모하며 “지난 시절을 가만히 돌이켜보니 가야산에서 출발한 활발발한 긴 여정은 천하의 사방사유를 수행과 교화로써 주유하시다가 비로소 만불산 자락에서 석장을 멈추니 산봉우리는 고개를 떨구고 물소리마져 잦아든다”고 조사를 전했다.

스님의 제자들과 재가불자들은 봉주 스님이 평생 보인 가르침 그대로 수행과 정진에 임하겠다는 각오로 애도의 마음을 대신했다.

문도대표 학성 스님은 “봉주 스님께서는 오랜 와병에도 늘 한결같은 수행자의 모습이셨다”며 “은사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늘 정진하는 마음으로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영결식에서는 봉주 스님의 생전 애창곡이었던 ‘동백아가씨’를 비롯해 속환사바를 바라는 대중의 마음을 담은 음성공양을 마련해 헤어짐의 슬픔을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가는 불교식 장례문화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영결식에 이어 봉주 스님의 법구는 오색만장의 배웅을 받으며 만불사 연화대로 이운됐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성이 산중 가득 울리는 가운데 봉주 스님의 법구는 사대를 버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봉주 스님은 1936년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났다. 10대 초반인 1949년 2월 해인사에서 당대 선지식인 인곡 대종사로부터 사미계를 수지, 득도했다. 같은 해 가을 조선불교 교정 한암중원 스님에게 도첩을, 1961년 봄 범어사에서 동산혜일 스님에게 비구계를 수지했다.

1953년 해인사 선원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 창원 성주사 선원,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울진 불영사 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두루 수행했다.

수행납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대중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외호하는 소임도 마다하지 않았다. 1960년 해인사 감찰원으로 취임하면서 종단정화의 일선에서 섰고 진주 응석사, 평찬 상원사, 청도 용천사, 거창 송계사 등 전국의 사찰 주지 소임을 맡아 사격을 다시 세우고 불법을 홍포하는데 앞장섰다.

5~10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중앙종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1978년 총무원 총무부장, 1983년 총무원 인사위원장, 1991년 제도개혁위원회 부위원장, 1992년 초심호계위원장, 1998년 선거관리위원장 등을 맡아 종단 안팎의 안정에도 힘썼다.

특히 스님은 한국불교의 세계화의 원력을 세워 1981년 제3차 세계불교대회와 1984년 전일불교총회, 1986년 제4차 세계불교승가회, 1990년 한·중불교대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95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승가회에서 총무위원으로 선출돼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일선에서 헌신했다.

수행자의 본분행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나 상좌에게 바늘 끝만큼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스님으로 정평이 나있었지만 IMF경제위기로 전 국민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는 다비 비용으로 모아두었던 수백만 원을 쾌척하는 자비를 보이기도 했다.

2004년 만불사 조실로 추대된 봉주 스님은 1월23일 새벽 ‘일생사 꿈같고 이슬 같고 거품 같아라. 죽음은 본래 없으니 어찌 싫어할 것인가. 한 생각 내려놓고 무애가를 부르니 태어나기 전 본래면목으로 나아가리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대구지사=김영각 지사장

[1523호 / 2020년 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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