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 무상정등각-상

기자명 현진 스님

금강경은 마음 다스리는 법에 대한 부처님 답변

해탈을 향해 가는 대승불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지
부처님께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

‘금강경’ 제2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선남선녀는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항복시켜야만 합니까?”라고 부처님께 질문을 드리는데, ‘선남선녀’를 꾸며주는 말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부분이 범어본(梵語本)을 그대로 옮긴 현장역(玄奘譯)엔 살짝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보살의 수레를 일으켜 나아가려는 모든 자들은[諸有拔趣菩薩乘者] 그 마음을 어떻게….’

널리 알려진 대로 ‘아뇩다라(anuttara)삼먁(samyak)삼(sam)보리(bodhi)’는 한문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위없는 바르고 동등한 깨달음)’에 해당하는 범어인데, 범어본의 ‘보살의 수레를 일으켜 나아가려는 자들’이 구마라집역[羅什譯]에서 어떻게 그리 옮겨진 것인지 아리송하다. 범어판본이 다른가? 아니면 뜻을 좇아 옮겨진 말인가?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에서 뜻을 좇아 옮겨진 것이 어렵지 않게 보이기에 그리 여긴다면, 두 표현의 차이에서 구마라집 스님이 의역(意譯)하며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보살의 수레, 즉 대승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보살이 이끄는 수레를 일으켜 해탈을 향해 나아가려는 이라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사실, 부파불교에서 부처님을 제외한 모든 수행자들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아라한으로 한정해놓은 것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의미이기도 한데, 어쩌면 그런 형식적인 한계도 벗어버린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는[無上] 깨달음’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기개를 드러내놓은 뜻 옮김인지도 모르겠다.

‘금강경’은 “그 마음[心]을 어떻게 머무르게[住]해야 하고 어떻게 항복시켜야만[降伏]합니까?”라는 수보리의 이 한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다. 해탈을 위해 대승불자로서 수행하고자 하는 이들, 그래서 ‘무상정등각 하리라’는 마음을 낸 이들은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게 하고 항복시켜야 하는지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쭤본 것이다.

그런데 범어본엔 구마라집역의 두 항목인 주(住)와 항(降) 외에 “그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修] 하는가?”라는 항목이 더 존재한다. 범어를 기준으로 세 항목을 나열하면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게 해야[sthātavya, 住] 하며, 그 마음에 어떻게 접근해야[pratipattavya, 修] 하며, 그 마음을 어떻게 장악해야[pragrahītavya, 降] 합니까?’로 표현되어 있다. 즉, 대승불자로서 해탈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마음을 안정[住]시킬 수 있고, 그런 뒤에 어떻게 해야 그 마음에 나아가 닦을[修]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런 뒤에 어떻게 해야 그 마음을 완전히 장악[降]할 수 있는지 부처님께 질문 드린 것이다.

‘금강경’의 주요 주석서 내용에 근거하면, 대승수행자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안정[住]시킬 수 있고, 마음이 안정되면 보시바라밀 등 6바라밀을 실행함으로써 그 마음을 닦을[修] 수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금강경’ 본문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렇게 안정된 마음과 닦여진 마음에 4상(四相)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마음 그대로가 대승 수행자에 의해 온전히 장악된 마음일 뿐, 마음을 장악하기 위한 별도의 무엇이 필요치는 않다고 하였다.

우선, 심(心)으로 번역된 '마음'의 범어는 ‘찟따(citta)’이다. 남방 상좌부불교의 전통에서는 찟따(citta)와 마노(mano) 및 윗냐너(viññāṇa)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좀 더 면밀히 세분하면 ‘찟따’는 보다 정서적인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요 ‘마노’는 이성적인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며 ‘윗냐너’는 인식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어서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수보리는 ‘찟따’를 들어 그것이 안정되고 닦여지며 장악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쭌 것이다. 비록 한문으로 심(心)이라 옮겨놓았기에 우리말로는 ‘마음’ 외에 별다른 선택의 폭이 없을 것 같지만, 유사하게 사용된다는 세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한문 심(心)에 가려진 찟따의 본모습을 조금이나마 더 엿볼 수 있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23호 / 2020년 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