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최북의 ‘풍설야귀인’
24. 최북의 ‘풍설야귀인’
  • 손태호
  • 승인 2020.02.11 15:49
  • 호수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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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치는 밤을 걸어본 자만이 느끼는 삶의 무게

괴팍한 기행으로 유명했던 최북이 붓 아닌 손으로 그린 작품
도화서 소속 아닌 그림으로 생계 유지한 조선 최초 직업화가
최북 작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종이에 담채, 66.3×42.9㎝, 18세기, 개인 소장.
최북 작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종이에 담채, 66.3×42.9㎝, 18세기, 개인 소장.

조선회화 작품 중 눈 쌓인 풍경이나 눈 덮인 대나무를 그린 작품이 여럿있지만 그 중 가장 추운 그림은 조선후기 괴팍한 기행으로 유명한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 1712~1786)의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입니다. 눈 덮인 하얀 산에 하늘이 어두운 것을 보니 시간은 밤인 모양입니다. 날카롭게 꺾인 산세와 성긴 나무들은 이곳이 아주 깊은 산속임을 알려줍니다. 험준한 산 아래 나무들이 바람에 꺾일 듯 휘어져 있고 허물어질 듯한 울타리와 그 안쪽으로 초가집이 한 채 있습니다. 사립문 앞에는 검은 개 한 마리가 짖어대는 듯 입을 벌리고 꼬리를 말며 달려 나오고 있고 그 앞으로는 지팡이를 든 선비가 어린 동자를 데리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한눈에 봐도 매우 거칠고 빠르게 그려낸 티가 확연합니다. 구도를 생각하고 색감과 적당한 필선을 신중히 계산하여 그린 그림이기보다는 아마 화가의 마음속에 있던 화의를 종이를 대하자마자 마치 무엇인가 홀린 듯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풍설야귀인’이 더욱 거칠게 느껴지는 이유는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손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이기 때문입니다. 지두화는 지화(指畵), 지묵(指墨)이라고도 하는데 손가락이나 손톱 끝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을 말하며 간혹 손등과 손바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전통 있는 기법으로 인정받아 지두화로 이름을 날린 화가들이 제법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천하게 여겨 그렇게 많이 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18세기가 되어서 심사정이 여러 점의 지두화 작품을 남겼고 최북도 지두화로 몇 점 그림을 그렸는데 바로 ‘풍설야귀인’이 최북 지두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두화는 붓으로 그린 것에 비하여 날카롭게 그어지는 독특한 효과 때문에 경우에 따라 붓으로 그린 그림보다 훨씬 표현력이 강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북은 이런 지두화의 강점을 잘 알고 있는 화가였습니다. 그림에서도 바람에 꺾여 휘어지는 나무 표현에서 그 효과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아마 붓으로 표현했다면 나뭇가지를 휘어 버릴 만큼 강한 눈보라의 느낌이 반감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림의 중심이 좌측 하단에 있어 균형을 맞추기 위해 화제(畵題)는 우측 상단 빈 하늘에 작지 않은 크기로 적혀있는데 ‘風雪夜歸人’이란 글씨는 지두가 아닌 붓으로 썼습니다. 인장은 호인 ‘호생관(毫生館)’이라 적힌 주문방형(朱文方形) 인장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화제로 적은 ‘풍설야귀인’은 잘 알려진 것처럼 당나라 시인 유장경(劉長卿, 709~786)의 ‘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이란 시 구절로, 실제 눈 때문에 산 아래 초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경험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일모창산원 천한백옥빈 시문문견폐 풍설야귀인(日暮蒼山遠 天寒白屋貧 柴門聞犬吠 風雪夜歸人)’ 해 저물어 푸른 산이 멀리 보이는데 날은 춥고 초가는 가난하구나. 사립문에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가는 나그네.

시 전체를 읽고 보니 그림이 좀 더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두워지는 하늘빛은 어느덧 밤인 것을 알리고 푸른 산이 멀리보이는 이유는 하얀 눈에 덮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산 아래 단출하고 가난한 초가 한 채가 나무도 꺾어버릴 정도의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간신히 서 있습니다. 초가의 대충 얼기설기 엮은 사립문 앞으로 검둥개 한 마리가 사납게 짖고 있는데 그 앞으로 지팡이를 짚고 등짝이 굽은 선비가 아이를 데리고 눈보라 속으로 돌아가는 그 뒷모습이 매우 고단해 보입니다. 이러한 인물 표현은 평생 어디 한곳 정착하지 않고 부평초처럼 떠다닌 작가 최북의 삶을 보는듯하여 마음 한편이 찌릿해집니다.  

최북은 한미한 중인 집안 출신 화가입니다. ‘북(北)’이란 이름은 나중에 개명한 것이고 그 글씨를 파자(破字)하여 칠칠(七七)로 개명한 점과 말년에 ‘붓으로 먹고 산다’는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이름과 호는 그의 기이한 행동과 연관시켜 괴팍하고 오기와 자만으로 똘똘 뭉친 반항적인 인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하지만 이점은 다소 오해가 있는 해석입니다. 

호생관이란 호에 대해서도 ‘붓으로 먹고 산다’라는 의미로 전문 직업화가인 최북의 자조적인 의미의 호로 해석되었지만, ‘호생관’은 명나라 유명한 남종문인화가인 정운봉(丁雲鵬, 1547~1628)의 호로 정운봉은 불교에 귀의하여 불화 및 불교인물화를 잘 그렸으며 ‘호생’이란 말도 불교적 의미입니다. 정운봉에게 ‘호생관’이란 인장을 선물한 명나라 유명한 화가인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그의 저서 ‘용대집(容臺集)’에서 ‘호생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생(衆生)에는 배에서 자라 나오는 태생(胎生), 알에서 나오는 난생(卵生) 외에 습생(濕生), 화생(化生) 등이 있다. 나는 보살이 붓에서 나온 호생(毫生)이라 여기나니, 대개 화가의 손끝에서 빛이 나며 붓을 잡을 때 보살이 하생하시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이런저런 뜻이 몸을 만들어내고 내가 말한 건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붓으로 보살을 그려내기에 호생이라 했다는 말입니다. 

원래 이름 식(埴)에서 ‘북(北)’으로 개명한 이유도 ‘北’은 한자의 모습으로 ‘달아나다’ ‘등지다’ 등의 의미로 괴팍한 외톨이적 삶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北’은 방위에서 북쪽을 뜻하니 ‘임금의 자리’ ‘귀인’ 이란 의미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北’을 둘로 쪼갠 ‘七七’도 ‘칠칠이’ ‘칠뜨기’ 등 바보 같은 행동거지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생각되지만 ‘七七’은 당나라의 아주 유명한 신선인 ‘은천상(殷天祥)’의 호로 날마다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다니며 꽃피는 계절이 아니라도[無] 꽃을 피게 하는[有] 재주가 있던 은천상의 모습을 염두에 두어 스스로 붙인 호입니다.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본의의 화업을 상징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는 최북과 가까웠던 이용휴(李用休, 1708~1782)가 최북의 금강산 그림에 적은 찬에 “은칠칠은 때도 아닌데 꽃을 피우고, 최칠칠은 흙이 아닌데 산을 일으켰다. 모두 경각 사이에 한 일이니 기이하도다”고 한데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최북의 이름과 호에 관련된 의미들은 전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 당대부터 오해를 일으켰고 누구보다도 강한 자의식이 불같은 성격으로 이어져 오기, 고집, 자만 등으로 표출되어 많은 기행과 광기어린 행동으로 당대의 부정적인 평가만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최북의 최후는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열흘이나 굶고 간신히 그림 하나를 팔아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고 대취하여 눈보라치는 밤, 성 밖으로 나가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풍설야귀인’의 선비처럼 집을 등지고 눈보라를 맞으며 돌아올 수 없는 겨울 산을 향해 걸어가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붓 끝에서 보살이 태어난다는 호생관의 의미를 간직한 최북. 그의 작품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것은 우리 시대 불자들의 몫이 아닐까 합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24호 / 2020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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