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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복 ➃

기자명 박희택

“선함도 악함도 보리심 내는 자량”

보살의 육바라밀 실천에서
선과 악 대극은 성립 안돼
보리심을 발할수만 있다면
악한 인연도 깨달음의 자량

육바라밀이 깨달음과 행복의 자량(資糧, 양식)이 됨을 살펴보았다. 여러 경전에 보이는 ‘보리자량품’은 깨달음과 행복에 이르는 양식을 설하고 있다. 육바라밀이 대표적인 자량이며, 달리 표현되고 있는 것이라 하여도 이타와 자리의 합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육바라밀로 수렴할 수 있다고 하겠다.

앙드레 지드가 ‘지상의 양식’(1897)에서 ‘사람들은 산의 높음에 대해서는 곧잘 말하지만, 계곡의 깊음에 대해서는 도무지 말하지 않는다’며 탄식한 바 있거니와, 산의 높음과 계곡의 깊음 양자를 합일하는 안목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글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이타와 자리의 합일이며, 그 과정에서 선함과 선하지 않음의 합일까지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깨달음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보살의 육바라밀 실천에서 선과 악의 대극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대극을 탈이원적 중도로 합일하는 주인공이 보살이다. 만일 선과 악 어느 한편에 취착(取着)한다면, 이로 말미암아 다른 한편에 대하여 다양한 폭력을 행사하기 마련이며, 이것은 결단코 보살의 삶은 아니다.

‘대방편불보은경’은 일체중생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인연에 선하지 않음도 포함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비한 마음, 보시하는 마음, 환희, 은애, 화합, 선지식, 불성을 봄, 진리를 들음 등은 물론이고, 성내는 마음, 인색한 마음, 번뇌, 이별, 원증, 악우 등도 보리심을 일으키는 인연으로 동시에 설하고 있는 것이다. 경문을 보도록 한다.

“일체중생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인연은 한 가지가 아니다. 혹은 자비한 마음을 인연하여, 혹은 성내는 마음을 인연하여, 혹은 보시하는 마음을 인연하여, 혹은 인색한 마음을 인연하여, 혹은 환희를 인연하여, 혹은 번뇌를 인연하여, 혹은 은애와 이별을 인연하여, 혹은 원증과 화합을 인연하여, 혹은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인연으로, 혹은 악우를 만난 인연으로, 혹은 불성을 보는 인연으로, 혹은 진리를 듣는 인연으로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一切衆生發菩提心 其事非一. 或因慈心, 或因恚心, 或因施心, 或因慳心, 或因歡喜, 或因煩惱, 或因恩愛別離, 因怨憎和合, 或因親近善知識, 或因惡友, 或因見佛, 或因聞法).”

이 가르침은 깨달음과 행복을 지향하는 보살의 길에서 대단히 주요한 의미를 띤다. 우리가 보리심을 발하기만 하면 설사 선하지 못한 인연이라 하더라도 자량이 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선한 인연만이 깨달음과 행복의 양식이 아니다”는 것은 위대한 합일과 긍정의 관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숙업이 깊고 번뇌가 크다고 하여도 미리 자포자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지 보리심을 발하여 어떤 인연이든 자량으로 삼아 보리행을 행하면 깨달음과 행복을 성취할 수 있음을 직지해준다.

근자에 열반한 적명 스님이 일기에서 “이 여름 또 헛되이 보냈거니와 헛것이 모여 또한 퇴비가 되는 것, 새 가을과 겨울을 향하여 기도하자”고 한 것은 이 같은 보리심의 인연을 표백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기에 스님은 “깨달음은 일체가 자기 아님이 없음을 보는 것이니,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이 깨달은 자이다”는 정설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리심을 발하여 나아가는 보살의 삶에서 깨달음과 행복의 자량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과 악의 이원적 대극도 없다. 그렇기에 붓다의 사상적 후예인 프리드리히 니체와 칼릴 지브란과 헤르만 헤세와 같은 눈 밝은 이들도 이러한 정신을 작품에 채워 넣었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1886)를 저술하였으며, 헤세는 ‘싯다르타’(1922)에서 선과 악을 아우르고 넘어서는 생명을 소리로 표현하면 ‘옴’이라고 하였다. 지브란은 ‘예언자’(1923)에서 악은 고통 받는 선이라고 새롭게 개념 정의하고 있다. 시대가 강퍅할수록, 자신이 초라할수록 용기와 희망으로 깨달음과 행복의 보살도를 걸어갈 일이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525 / 2020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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