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1.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㊶ 원광(圓光)의 불교사상과 새로운 사회윤리관 ②

유학과 현학 등 세속학문 추구하다 중국 유학 중 불교 만나 출가

신라 승려 유학기간 10년 이내였으나 원광은 25년 장기 유학
기록 살펴보면 자장과 달리 최고 귀족 출신 아닌 것으로 보여
출가했지만 세속학문 영향받아 ‘세속오계’ 등 새 윤리도 제시

고려대장경 속고승전 권13 의해편9 신라국황륭사석 원광부원안.
고려대장경 속고승전 권13 의해편9 신라국황륭사석 원광부원안.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교학승의 자료만을 따로 모아 놓은 ‘의해(義解)’편에서 원광전을 가장 먼저 싣고, ‘속고승전’과 고본 ‘수이전’의 원광전의 전문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그밖에 일연은 ‘삼국사기’의 관련 자료, 운문사 등에 전하는 고문서, ‘해동고승전’ 원광전 등의 원광에 관한 자료들까지 총망라하여 검토하고 종합해 주었다. 그 결과 원광에 관한 자료는 오늘날 신라의 승려 가운데서 비교적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광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이해는 아직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학자에 따라 해석에서 적지 않은 혼란이 야기되기까지 하였다. 원광의 출신 가문과 생몰년, 그리고 출가의 동기와 과정, 중국 유학의 배경 등 행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에서 ‘속고승전’과 고본 ‘수이전’의 기록이 전혀 상이한 사실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원광의 사상에 관해서는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 3권,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1권 등 ‘여래장경’에 대한 저술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오래전에 모두 실전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상 내용은 추적할 길이 없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원광에 관한 자료 가운데 ‘속고승전’ 원광전을 중심으로 하고, 기타 상이하거나 모순되는 내용의 자료들을 비교 검토하고 종합하여 원광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인 이해에 접근해 보려고 한다. 원광의 생애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출신 가문과 생몰 연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원광의 출신 가문에 대해서 ‘속고승전’에서는 박씨(朴氏)라고 한데 반하여 ‘수이전’에서는 설씨(薛氏)라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일부 학자는 설씨라고 한 점을 주목하여 원광을 6두품 출신으로 해석하고 원광의 행적과 사상의 성격을 진골 귀족에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박씨라고 해석한 학자들은 ‘중고’시기의 이른바 박씨왕비족(朴氏王妃族)을 주목하여 최고 진골귀족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중고’시기에는 아직 박씨나 설씨 등의 성씨는 사용되지 않았고, 이름 앞에는 성씨 대신에 탁부(양부), 사탁부(사량부) 등의 소속부 이름만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성씨 사용은 국왕만이 중국 왕조와의 교류과정에서 김씨(金氏)를 칭하고 있었고, 기타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이 성씨를 사용하였던 사실이 발견될 뿐인데, ‘속고승전’에서 원광이 박씨, 자장이 김씨로 기록되었던 것이 유일한 예였다. ‘중고’ 시기의 박씨는 후대에 소급해서 붙여진 성씨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원광은 최고 귀족 출신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광의 그러한 신분이 김씨 출신으로 신라 왕실과 가까운 친족 관계였던 자장과는 다른 행보를 걷게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 원광의 생몰 연대에 대해서 ‘속고승전’에서는 신라의 건복(建福) 58년에 99세로 입적하였는데, 이때가 당의 정관(貞觀) 4년(630)이라고 하여 그의 생몰 연대를 ‘532~630’년으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이 자료를 인용하면서 원광의 몰년이 정관 14년(640)이 되어야 한다고 수정하였다. 이것은 건복이라는 연호가 진평왕 6년(584)부터 사용되었으므로 건복 58년은 정관 14년(640)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건복이라는 연호는 선덕여왕 3년(634)까지만 사용되었고, 또 건복 58년에 해당되는 정관 연호의 연대는 14년이 아닌 15년에 해당되므로 일연의 주석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속고승전’과 그것을 고증한 일연의 연대 추정에 의하면 원광의 생몰 연대는 532(533)~630(631)년, 또는 542(543)~640(641)년으로 계산된다. 또한 원광의 입적 때의 나이는 80~90세 정도로 추정된다. 한편 ‘수이전’에서는 원광이 36세로 중국 유학을 떠나서 11년 뒤인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하였으며, 84세에 입적하였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의 생몰 연대는 554~637년으로 추정되어 앞에 제시한 ‘속고승전’의 연대, 또한 일연이 수정한 연대와도 일치하지 않다. 

원광의 중국 유학 연대는 ‘속고승전’에서 개황(開皇) 9년(589)보다 여러 해 전에 25세의 나이로 중국에 유학하여 몇십년만에 귀국한 것으로 서술된 것에 반하여 ‘수이전’에서는 중국에 유학한지 11년만인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원광의 유학 연대는 진평왕 11년(589)~진평왕 22년(600)년으로 추산되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런데 ‘속고승전’ 귄22 혜민전(慧旻傳)에 의하면 혜민(573〜649)이 15세 때인 진(陳) 정명(禎明) 원년(587)에 회향사(廻向寺)에서 신라의 광법사(光法師)로부터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 광법사가 원광으로 비정되므로 원광이 589년보다 2년 전에 이미 중국에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속고승전’ 원광전에서 이 시기에 원광이 호구산(虎丘山)에 머물다가 신도들의 요청으로 하산하여 ‘성실론’과 ‘반야경’을 강의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내용과도 부합되어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따라서 ‘수이전’과 ‘삼국사기’에서 원광이 중국에 유학을 갔다는 진평왕 11년(589)은 진(陳)이 멸망하자 원광이 수(隋)의 서울인 장안(長安)으로 옮겨갔던 해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자료들에 의해 확인되는 연대들을 종합하여 원광의 생애를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광의 생애는 중국에 유학하여 다양한 교학을 연구하던 시기와 귀국 이후 선각자로서 활동하던 시기로 크게 양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편리하다. 먼저 중국 유학 기간에 관해 살펴보면 원광은 550년 즈음 출생하여 25세가 되는 575년 전후에 중국에 유학하여 처음에는 강남 지방인 진의 수도인 금릉(金陵)과 호구산에 머물면서 불교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589년 진이 멸망하고, 수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자 수의 수도인 장안으로 옮겨가서 새로운 불교학을 접하였다. 원광이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진평왕 22년(600) 50세 전후였다. 

참고로 원광을 전후하여 중국에 유학한 신라 승려들의 출국과 귀국 연대를 정리하면, 각덕(覺德, ?~549), 명관(明觀, ?~565), 지명(智明, 585~602), 담육(曇育, 596~605), 안함(安含, 601~605), 자장(慈藏, 638~643)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유학 기간은 지명의 17년을 제외하면 대개 4~9년으로 10년 이내의 기간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원광의 유학 기간은 예외적으로 25년 정도의 장기간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원광이 중국에 머물고 있던 때는 남북조 말기에서 수나라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정치적으로는 오랜 기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제국을 성립시켰고, 불교사에서는 실천 중심의 북조불교와 교학 중심의 남조불교를 통합하면서 인도의 불교를 수입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불교를 성립시키는 단계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남북조 시기 불교는 크게 남조의 교학불교와 북조의 실천불교로 나뉘어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는데, 교학불교로서는 열반학파(涅槃學派), 성실학파(成實學派), 지론학파(地論學派), 섭론학파(攝論學派) 등이 번성하였고, 실천불교로서는 선(禪), 정토(淨土), 계율(戒律) 등의 불교가 유행하면서 다음 시기의 수(隋)・당(唐)의 불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원광의 유학생활에 대해서는 ‘속고승전’의 내용이 좀 더 자세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원광은 원래 신라에서 현학(玄學, 道家)과 유학(儒學)을 섭렵하고, 제가서와 역사서(子史)를 연구하여 문장이 삼한에서 뛰어났다고 하였다. 이로써 원광이 처음 추구하였던 것은 세속적인 학문이었고, 지향하는 바는 진흥왕 6년(545) 국사(國史) 편찬의 실무를 담당하였던 문사(文士)들과 같은 역할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흥왕 13년(552)이나 진평왕 34년(612)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유교 경전들을 읽고 충도(忠道)를 지키기로 맹서한 2인의 속사(俗士)들과도 같은 입장이었던 것으로 본다. 또한 원광이 귀국한 뒤 오래지 않아서 가서사(嘉栖寺)로 찾아와서 세속적인 가르침을 부탁한 2인의 현사(賢士)들은 중국에 유학하기 전의 젊은 시절의 원광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혈연과 지연을 초월하여 자신의 능력으로 출세하려는 청소년들이 현사(賢士), 국사(國士), 속사(俗士) 등으로 불리었고, 이들 ‘사(士)’류로 표현되는 부류를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등용한다는 ‘중사(重士)’의 풍조가 나타나고 있었던 시기였다.

원광은 25세 때 신라에서의 공부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유학 목적도 불교학의 공부가 아니라 현학과 유학 등의 세속적 학문의 공부를 더욱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유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陳)의 서울인 금릉(金陵)에서 우연히 불교의 강의를 들은 이후 불교의 깊은 이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출가하게 되었다. 지적 탐구의 의욕에 불타던 젊은 원광에게 본국에서 미처 접해보지 못했던 진(陳)의 발달된 불교 교학은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동진(東晋) 이후 남조에서는 불교의 교리 연구가 크게 발달하고, 아울러 노장사상에 기초한 현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불교 승려들뿐만 아니라 세속의 일반 지식인들에게도 불교의 핵심개념인 공(空)사상과 현학의 주요 주제인 유(有), 무(無)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원광도 처음 추구하던 것은 세속의 학문이었으나, 수학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교에 접할 기회가 생겼고, 마침내 불교를 공부하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처음 관심을 기울였던 유교 등의 세속적인 학문은 그의 사상 형성과 평생의 삶의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뒷날 세속의 청년을 대상으로 하여 세속오계 같은 새로운 윤리덕목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광의 이러한 자세는 문수신앙을 통한 호국불교의 홍포와 계율을 통한 교단의 정비에만 주력한 자장의 입장과 구분 짓게 하였던 것으로 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27 / 2020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