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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엄성중 – 대자재천왕의 해탈경계

기자명 해주 스님

부처님 깨달음은 하나이나 경계 헤아릴 수 없어 해탈문은 한량없다

해탈은 번뇌계박에서 벗어나 생사윤회의 고통서 벗어나는 것
법계의 모든 법은 다 불이고 해탈문은 모두 부처님의 공덕행
세주들 통해 부처님 믿고 찬탄하는 것이 곧 해탈 경지임 확인 

천은사 극락보전 신중탱화.
천은사 극락보전 신중탱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매일 조석 예불 때 사루는 이 향을 오분법신향이라고 합니다. 이 향공양을 시방 법계의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께 올리는 것으로 상단 예불을 시작합니다. 계정혜 삼학의 수행으로 이룬 해탈의 경지에서 알고 보는 일상이 불자들의 참 향기로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보리도량에 운집한 세주들이 곧 해탈장엄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러면 해탈이란 무엇이며, 세주들은 각기 어떤 해탈문을 증득하여, 어떻게 해탈경계를 펴고 있는지 만나보기로 하겠습니다.  

보통 스님들이 고양이를 ‘해탈’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생에는 꼭 살생업에서 벗어나 해탈하라는 뜻에서 이름 지은 것입니다. 예전에 아무개 스님은 마당 비질에서 해탈했고, 아무개 스님은 설거지 하는 것은 거의 해탈 경지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해탈이란 게 별게 아니고 무슨 일이든 익숙해져서 달인처럼 되거나, 힘든 일에서 벗어나 편안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금생에는 해탈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

먼저 ‘해탈’이라는 한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부터 본다면, ‘해’는 해번뇌지계박(解煩惱之繫縛)이고, ‘탈’은 탈생사지윤회(脫生死之輪迴)라고 해석해왔습니다. 즉 ‘번뇌의 계박에서 풀려나고,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번뇌로 인한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하겠습니다. 생사해탈은 전생·금생·내생의 삼생윤회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순간순간 생멸하는 찰나윤회의 속박에서도 자유로워진 대자유이고 대신통입니다. 그래서 해탈에 도움이 안 되는 일은 다 쓸데없는 짓이겠습니다. 생사업이 아니고 늘 해탈업이 되도록 정진해야 되겠지요.

‘세주묘엄품’에서 세주들은 다 부처님을 뵙는데 장애가 없고[見佛無礙] 항상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예경제불원’과 ‘칭찬여래원’ 등 보현원행이 곧 해탈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첫 게송은,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께서 체성이 적멸하지만 세간을 구제하시기 위해 출현하심을 찬탄한 것입니다.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 가운데 대표되는 묘염해(妙焰海) 천왕이 부처님을 찬탄한 이 게송은, 묘염해 천왕 자신의 해탈경계를 읊어 보인 것이기도 합니다.      

“부처님 몸은 널리 모든 대회에 두루 계시며 / 법계에 충만하여 끝까지 다함이 없으시니 / 적멸하여 체성이 없어 취할 수 없으나 / 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출현하시도다.”

불신보변제대회(佛身普遍諸大會)  
충만법계무궁진(充滿法界無窮盡)  
적멸무성불가취(寂滅無性不可取)  
위구세간이출현(爲救世間而出現) 

(화엄경 제2권, 세주묘엄품 2)

이 경계를 알 수 있는 것은, 묘염해 천왕이 ‘법계 허공계의 적정한 방편력의 해탈문’을 성취한 까닭이라 하겠습니다. 법계적정은 체이고 방편력은 용으로서, 방편력은 바로 세간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힘이라 하겠습니다. 이 해탈문에 의해 부처님 법신을 찬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자재천은 색계의 제4선천에 속하는 색구경천입니다. 대자재는 범어로 마혜수라이니 마혜수라 천왕은 대천세계를 주재하는 가장 자재한 천신입니다. 팔이 8개[八臂]이고 눈이 3개[三目]이며 흰 소를 타고 흰털의 불자를 잡은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한순간에 대천세계의 빗방울 수를 다 안다고 하니, 이것은 한량없는 해탈문의 수와 그 경계를 다 아는 것에 비유한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대자재천왕들은 ‘화엄경’ 제1권에서는 상수 대중들의 명호와 함께 모두 모양 없는[無相] 법을 관찰하여 행하는 바가 평등하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2권에서는 대자재천왕들이 성취한 해탈문을 소개하고 해탈경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상수되는 천왕들의 명호와 해탈문의 이름에서 대자재천왕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해탈문은 주로 법계의 법이 적정하여 생멸거래가 없는 진실상을 관하여 보고 중생들을 안락케 해주는 것입니다. 대자재천왕들이 성취한 해탈문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법계 허공계의 적정한 방편력. ②일체 법을 널리 관하여 다 자재함. ③일체 법이 생멸 거래가 없음을 아는 무공용행. ④일체법의 진실한 모습을 환하게 보는 지혜바다. ⑤중생들에게 끝없는 안락을 주는 큰 방편과 선정. ⑥적정한 법을 관하여 모든 어리석음의 공포를 멸하게 함. ⑦끝없는 경계에 잘 들어가 일체 모든 존재에 사유하는 업을 일으키지 않음. ⑧널리 시방에 가서 법을 설하되 움직이지 않고 의지하는 바가 없음. ⑨부처님의 적정 경계에 들어가 광명을 널리 나타냄. ⑩스스로 깨달은 곳에 머물러 끝없이 광대한 경계로 반연할 바를 삼음.

‘청량소’에서는 이 해탈문에 대해 ⑤는 자장해탈(慈障解脫)이고 ⑥은 비장해탈(悲障解脫)이며 ⑦은 업장해탈(業障解脫)이라고 해석합니다. 즐거움을 주는데[與樂] 걸리는 장애에서 벗어난 대자가 해탈이고, 고통을 없애주는 데[拔苦] 걸리는 장애에서 벗어난 대비가 해탈입니다. 또 분별하지 않는 선사유가 해탈업인 것입니다. 

묘염해 천왕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열개의 게송에서 상수되는 대자재천왕의 해탈경계를 차례로 연결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위에서 인용한 첫 게송에서 찬탄한 법신에 이어, 부처님의 출현·무분별·지혜·공덕·설법·색신·음성·광명·교화 등을 찬탄하면서, 그 해당 경계를 아는 대자재천왕의 해탈을 차례로 연결시켜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래 법왕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어/ 능히 세간을 비추는 미묘한 법의 등불을 켜시되/ 경계가 끝이 없고 또한 다함이 없으니/ 이것은 자재명칭광 천왕이 증득한 바로다.”(화엄경 제2권)라는 이 게찬에서는 자재명칭광 천왕을 부처님과 함께 칭찬한 것입니다.  

자재명칭광 천왕은 이미 ‘일체 법을 널리 관하여 다 자재한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한 법 가운데 일체 법을 관하여 무애 자재합니다. 이러한 관법은 법을 보는 눈, 화엄의 지혜 눈인 보안(普眼)이 필요합니다. 보는 지혜[能觀智]가 있어서 보이는 경계[能觀境]가 나타나므로, 대상을 보고 아는 지혜 마음이 중요한 관건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대자재천왕들의 해탈문을 묘염해 천왕의 게찬과 대조하여 도시하면 다음 <표3>과 같습니다. 여기서 법계의 모든 법은 다 불(佛)이고, 모든 해탈행은 다 부처님의 공덕행임을 확연히 알 수 있겠습니다.  

‘세주묘엄품’에서는 모든 세주들의 게찬이 다 이러한 형식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듭 말해서 대표되는 세주가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자신과 상수 대중들이 성취한 해탈문의 경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하나이나 그 경계가 한량없어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해탈문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한량없는 해탈문을 빠짐없이 다 열고 들어가야 해탈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래야 한다면 성취할 기약이 없어 아예 포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한량없는 해탈문 중에 단 하나로도 얼마든지 해탈세계에 들어갈 수 있으니, 천왕들 역시 각기 해탈행 하나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탈한 모든 세주들이 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부처님을 믿고 찬탄하는 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임을 느끼게 합니다. 부처님을 예경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만 해도 해탈함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경하고 찬탄하는 ‘나’, 예경하고 찬탄함을 보는 ‘나’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예경하고, 공덕을 알아야 찬탄할 수 있으니, 부처님을 볼 수 있는 신심의 눈, 공덕을 알 수 있고 닦을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떠야겠습니다. 

의상 스님의 법손인 법융 스님은 일체 만법이 자기의 몸과 마음[自身心]이고, 자기 신심이 부사의 불법임을 굳게 믿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항상 지키는 것이 곧 좋아하는 것이고, 믿고 좋아하면 자기 신심을 친히 증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법융기) 믿음에 의해 자기 자신이 곧 법의 진실상임을 아는 지혜를 얻게 합니다.  

이와 같이 화엄법계에 들어가는 해탈문을 접하는 우리들을 더욱 환희롭게 하는 것은, 그 해탈문은 잠겨있는 문이 아니라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들어가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그 문도 문이 아니고 문 없는 문[無門]입니다. 

무문이라 함은 들어갈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법계 안에서 법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부터 그대로 법계에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 무문의 해탈문이라 하겠습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28호 / 2020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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