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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와스뚜(vastu)란

기자명 현진 스님

고정된 실체로 인식해 그것에 집착하는 것

와스뚜, 구마라집 스님은 ‘법’으로 
현장스님, ‘사’로 번역해 옮겼지만
의미 다양해 원문의 뜻을 못 살려

‘금강경’의 두 곳에 범어로 ‘와스뚜(vastu)’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문장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제4 묘행무주분으로 구마라집 역은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로 되어 있으며, 두 번째는 제14 이상적멸분으로 구마라집 역은 “심주어법이행보시(心住於法而行布施, 법에 머문 채 보시를 행한다면…)”로 되어 있다. 현장 역은 앞의 것이 “부주어사응행보시(不住於事應行布施, 일삼음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로 되어 있고 뒤의 것이 “위타어사이행보시(謂墮於事而行布施, 일삼음에 떨어져 보시를 행한다면…)”로 되어 있다. 한문번역 가운데 구마라집 역의 ‘법(法)’과 현장역의 ‘사(事)’가 와스뚜의 번역어에 해당한다.

‘금강경’의 내용 가운데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4상과 더불어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 또는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 등의 몇 구절만큼이나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와스뚜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문구들이다. 범어본엔 묘행무주분에 ‘na_vastupratiṣṭhita’로, 이상적멸분에 ‘avastupatita’로 되어 있어 모두 ‘vastu’란 단어가 보이는데, 구마라집은 이를 ‘法’으로 옮기고 현장은 ‘事’로 옮겼다. 이처럼 ‘vastu’의 번역어가 지나치게 다양한 의미를 지녔거나 아니면 간략한 의미인 法이나 事가 되다보니 정작 둘 모두 글을 읽는 이의 눈에 잘 뜨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범어 ‘vastu’는 ‘살다’라는 의미의 동사 ‘√vas’에 조사 ‘­tu’가 첨부되어 형성된 단어로서 ‘삶과 관련된 것, 대상, 실체, 바탕’ 등의 의미를 지닌 명사이다. 그런데 ‘금강경’에 쓰인 와스뚜는 설령 사전에 서술된 위와 같은 의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다분히 교리적인 색체가 가미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 내용을 갈무려 보면 ‘변화무상한 흐름의 일단(一段)을 고정된 실체로 인식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것’ 정도가 ‘금강경’에서 말하는 와스뚜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년기에 접어든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태어나서 어린 시절과 청년기 및 장년기를 보내고 노년기를 맞았을 것이다. 제3자가 그를 평하거나 판단할 때는 그에 대한 일평생 모든 기간의 상황들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죽마고우는 그와 어릴 적 보냈던 티 없이 맑았던 시절의 추억만으로 그를 기억하여 그가 좋은 벗이란 생각을 갖게 될 것이며, 어떤 친구는 그와 불편했던 일로 다투며 서로에게 주었던 상처 되는 말만을 기억한다면 그를 나쁜 놈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 경우 좋은 벗 혹은 나쁜 놈이라 여기는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에 대한 ‘와스뚜’'이다. 이렇게 와스뚜가 제법 나름의 의미를 지닌 반면에 그 번역어인 ‘法’이나 ‘事’는 그런 내용을 모두 실어낼 만큼 거론된 적이 없었던 까닭에 원문의 ‘와스뚜’가 간과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4 묘행무주분의 ‘보살은 머무름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란 부분을 위에서 밝힌 와스뚜의 의미를 살려서 옮겨보면 ‘보살은 와스뚜에 머문 채 보시를 행해서는 안 된다.’, 즉 ‘보살이라면 어떤 상황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내지 못한 채 그 흐름 가운데 특정 부분만을 참된 실체로 간주하고는 그것에 집착하는 상태에서 보시를 행해서는 안 된다’라는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보시는 육바라밀의 보시바라밀인데, 꼭 보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섯 바라밀의 대표로 보시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보시를 행하든 계를 지키든 아니면 인욕을 하거나 정진을 해나가고 선정에 들며 지혜를 추구할 때도 와스뚜에 머무름 없이 육바라밀을 행해야 함을 일컬은 것이다.

그런데 온갖 말썽과 무능함으로 애를 먹이는 짝지와 손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옛적 한 순간이나마 보여주었던 진실되고도 참된 모습을 기억하고 그것에 ‘와스뚜’하기 때문인데, 그리고 그러다 오랜 기간의 인내가 결실을 맺어 행복해지기도 하는 법이니, 그래서 속제(俗諦)로는 단순히 산술적인 평균값으로서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29호 / 2020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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