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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산 간월암과 만공 스님

민족해방 염원 모아 지극정성 천일기도…회향 3일 후 독립

한국불교 통제하려는 총독에 일괄…창씨개명도 거부한 만공 스님
억불정착으로 무너져 무덤 가득했던 황량한 간월암 중창불사
나라의 상징 무궁화에 ‘세계일화’ 휘호하며 동체대비 구현 염원

간월암 천일기도는 대외적으로는 평화기원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간월암이 독립을 발원한 조선인의 염원이 담긴 항일운동 현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것도 이때문이다.

“너와 내가 하나요. 만물중생이 다 한 몸이요. 세계만방 모든 나라가 하나다. 이 세상 삼라만상이 한 송이 꽃이니라.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조선 땅이 세계일화의 중심이 된다.”

35년간의 일제 억압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은 다음날, 가야산 남쪽 끝자락인 덕숭산에 머물던 수행자들도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독립 소식에 만공 스님(滿空, 1871~1946)은 상좌에게 붓과 무궁화꽃 한 송이를 가져오라 일렀다. 상좌가 그것들을 가져오자 만공 스님은 붓을 잡고 무궁화 꽃잎에 정성스럽게 휘호했다.

‘세계일화(世界一花)’

어느 제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쭈었다.

“저희가 어찌하면 세계일화의 큰 뜻을 펼 수 있겠습니까?”

만공 스님은 답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렁이도 부처님으로 보고, 참새도 부처님 받들 듯 섬기면 된다. 구더기도, 걸인도, 문둥이도 다 부처님으로 보아라. 왜인들도 부처님으로 볼 것이요, 불교를 욕하는 기독교인도 부처님으로 섬겨야 하느니라. 이리하면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세계일화’에는 패전국과 승전국 모두 하나의 꽃이 돼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만공 스님이 남긴 ‘세계일화’에는 종전 후, 패망한 나라나 승전국이나 하나의 꽃이 돼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원한을 자비로 승화시켜 동체대비(同體大悲)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공 스님은 일본의 탐욕스런 야망이 불러온 깊은 상처와 2차 세계대전으로 혼돈과 공포에 빠져있던 인류에게 패전국이나 승전국이나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야 한다는 화두를 준 것이다.

만공 스님은 근현대불교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와 맞섰던 고승, 어떤 상황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은 수행자로 꼽힌다. 만공 스님이 근현대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다. 1871년(고종8) 전북 태인에서 태어난 만공 스님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스님(1849~1912)의 법제자다. 선학원 창건(1921년)을 비롯해 조선불교 선종 창종 및 수좌대회 개최(1935년) 등 실질적인 선의 대중화를 주도했다. 일제가 전통불교 통제를 시도할 때 선승들이 계율수호, 불교 정화를 위한 유교법회를 개최(1941년)하고 범행단을 발족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만공 스님이 있었다.

만공 스님의 기개가 유감없이 드러난 사건은 1937년 2월 말의 일이다. 일제의 불교장악과 자주적인 건설운동이 교차되던 시기, 조선총독부 주관 아래 31본산 주지회의가 처음 소집됐다. 그 자리에는 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도 참석했다. 2월26~27일 이틀간 열린 회의는 한국불교가 일제가 의도하는 종단으로 전락할 것인지, 아니면 자주적인 종단으로 운영될 것인지 판가름 나는 분수령이었다.

당시 회의에서 총독부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불교를 통제할 수 있는 기관 설립의 당위성과 이를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총독의 한마디에 생사가 좌지우지되는 서슬퍼런 분위기 속에서 침묵을 깬 건 만공 스님이었다. 스님은 작심한 듯 한국불교의 모순이 식민지 불교정책에서 기인했음을 적시하고 향후 조선불교를 자주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일제의 불교 장악을 본격화하려는 순간에 조선의 선사가 의도를 꿰뚫고 일갈한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목숨을 돌보지 않은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결기였다. 만공 스님은 단상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치고 정교 분리를 강조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구전 기록에는 만공 스님이 총독에게 “조선 스님을 파계하게 만든 장본인은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일갈했을 때 회의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고 회의가 끝나고 관헌들이 스님을 체포하려 했으나 총독이 만류했다고 전한다. 총과 칼로 싸우지는 않았지만 목숨을 내건 강렬한 만공 스님의 할은 훗날 무장 투쟁 못지않은 중요한 항일 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침략자들의 정책에 반기를 들어 올곧은 마음가짐으로 온몸을 내던졌던 만공 스님은 1942년 서산 간월암에 들었다. 밀물 때는 섬이었다가 썰물 때는 뭍이 되는 작은 섬. 섬 전체가 절인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암자.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저쪽에 있다는 정토라 해서 피안사(彼岸寺),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비슷하다 해 연화대(蓮花臺)로도 불렸던 간월암에서 조선광복을 발원하는 천일기도를 준비했다.

간월암은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등을 중창해 ‘절 짓는 스님’이라고도 불렸던 만공 스님이 중창불사로 이뤄낸 곳이기도 했다.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득도한 곳이라지만 억불정책 앞에 무너져 무덤들이 가득했던 간월암을 만공 스님은 수십리를 걷고 30리뱃길을 헤치고 들어와 일으켜 세웠다. 황량하기만 했던 간월암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한 지 1년 후, 만공 스님은 천일기도를 입재했다.

만공 스님이 간월암에서 천 번의 낮과 밤을 보낸 기간은 태평양전쟁 말기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가장 가혹했던 시기였다. 스님들에게도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각종 불구(佛具)들을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착취해 갔다. 만공 스님은 일제의 발악이 계속되던 때 서해바다 외딴섬에 스며들어 독립기원 천일기도를 봉행하는 것으로 일제의 어떤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만공 스님의 젊은 수좌들은 징집에 응하지 않도록 금강산이나 간월도로 도피시켰다.

만공 스님은 간월암에서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바깥출입을 삼가고 지극정성으로 천일기도를 올렸다. 비구 원담 스님과 비구니 수연 스님 등이 스님의 시봉을 맡았다. 간월암 천일기도는 대외적으로는 평화기원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법석에서도 유관순 열사나 윤봉길 의사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순사들의 접근이 어려운 바다 한가운데 외딴섬을 골라 천일불공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 통치 35년 만에 독립이 된 것은 천일기도를 회향한 3일 후였다. 해방의 그날, 기도 동참자들은 절 마당에 태극기를 들고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살아서 조국이 독립되는 감격을 누린 이들은 다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해방 다음 날인 1945년 8월16일, 만공 스님은 나라의 상징 꽃인 무궁화의 꽃망울을 따서 붓을 삼아 ‘세계일화’를 휘호했다. 

평생을 덕숭산 일대에 머물며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던 만공 스님은 전강, 혜암, 벽초, 적음, 고봉, 용음, 춘성, 포산 등 걸출한 후학을 양성하고 1946년 11월13일 덕숭산 전월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62세, 세수 75세였다.

만공 스님은 일제의 손아귀에 던져져 만신창이가 돼가고 있던 한국불교 현장에서 ‘전통 간화선의 본질 회복’이라는 종교운동을 통해 ‘불교개혁과 항일’이라는 두 가지 시대적 책무를 온몸으로 풀어가려 했던 선지식이자 선각자였다. 최근에는 간월암에서의 천일기도 정진 시기, 만해 스님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했다는 새로운 증언이 나오면서 만공 스님이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활동 등에도 참여하는 등 적극적 항일투쟁을 벌였다는 사실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간월암이 일제의 집요한 공작에 의해 말살될 운명에 처했던 우리나라 선불교의 맥을 지켜온 곳일 뿐 아니라 조선인의 의지와 결속을 도모해 준 항일운동의 현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75년 전 우리가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사를 두려워 않는 선현의 기개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이제 독립운동의 범주를 직접적인 항쟁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정신적‧문화적 저항활동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가장 첫머리에 기록돼야 할 역사는 일제강점기 암흑 속에서도 한국불교의 전통과 한국인의 기개를 잃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처럼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만공 스님의 삶일 것이다.

서산=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33호 / 2020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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