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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중생의 눈을 뜨게 하다

기자명 광우 스님

“의학도 포기했던 시력 되찾은건 부처님의 광명”

신라 경덕왕 때 여인 지극히 기도 올리자 아들 시력 되찾아
中 인광대사도 훼불 일삼다 시력 잃고 지극한 참회 뒤 회복
부처님 눈을 뜨신 분이라 칭했으니 모두가 깨침의 눈 떠야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신라 경덕왕 때의 일이다. 서라벌 한기리(漢岐里)에서 살고 있는 ‘희명(希明)’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었다. 희명은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갑자기 눈이 멀었다.

희명은 눈이 먼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에 갔다. 벽에 그려진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 앞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아이에게 소원을 빌게 했다. 

“즈믄(천)손 즈믄(천)눈을 가지고 계신 관세음보살님! 당신은 눈이 천개인데 우리 아이는 한 개도 없습니다. 한 개도 없는 우리 아이에게 눈 하나만 주세요.”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과 중생을 향한 불보살의 자비는 같다고 할까. 어머니의 간절한, 모성이 가득한 기도는 결국 아이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중국 근대 불교의 가장 위대한 선지식 중 한 분으로 존경받는 인광(印光, 1861~1940) 대사는 ‘나무아미타불’ 염불 수행을 세상에 널리 포교한 큰스님이다. 인광 대사는 어렸을 때부터 불교를 전혀 믿지 않았다. 출가하기 전이었다. 젊은 시절에 글공부를 하다가 유학을 숭상하는 유생(儒生)들이 불교를 비방하고 천대하는 문장들을 보게 되었다. 자기도 젊은 혈기에 불교를 비방하는 글을 본 따서 부처님을 욕하고 깔보는 문장을 따라 지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갑자기 눈병이 나더니 실명이 되고 말았다.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외람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한 죄보로 눈이 멀게 되었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이 떠올랐다. 곧바로 부처님께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마음으로 간절히 참회를 올렸다. 그런데 우연이었을까, 점점 눈병이 낫게 되어 전과 같이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인광은 가슴으로 불교를 인정했다.

“불법이 절대로 허망한 가르침이 아니었구나! 내가 마땅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연구해봐야겠다.”

그 뒤로 여러 가지 경전을 구하여 읽고 사유하더니 크게 발심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때 인광의 나이 21세였다. 

스님은 치열한 수행과 단단한 공부로 훗날 심오한 경지를 체득했다. 항상 스스로를 ‘부끄러운 중’이라고 하심(下心)하며 순박하고 쉬운 언어와 문장으로 ‘염불 정토’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하니, 인광 대사를 사모하던 불자들은 그를 대세지보살의 화신이라며 존경한다.

아마도 인광 대사가 출가 전에 두 눈이 먼 것은, 더 큰 곳에 더 큰 인재로 쓰려는 불보살님의 방편은 아니었을까.

어느 불자 분에게 들은 가피 이야기이다.

시어머니가 아주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 시어머니의 왼쪽 눈은 완전히 실명 상태였다. 보리농사를 지을 때 낫으로 보리를 베다가 그만 보리 짚이 왼쪽 눈에 들어가 안구를 찌른 것이다. 시어머니는 금방 낫겠지 하고 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왼쪽 눈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심상치가 않아서 병원에 갔으나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버렸다. 결국에는 보리 짚에 찔렸던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한쪽 눈이 어두워졌으나 시어머니의 불심은 늘 지극하였다. 불편한 눈으로 항상 불공에 동참하고 늘 기도를 올렸다.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기도의 힘이었을까? 놀랍게도 현대 의학조차 포기했던 왼쪽 눈에서 희미하게나마 빛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물체가 또렷해져 갔다. 어느덧 실명이라고 여겼던 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어머니는 부처님의 가피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이 일을 옆에서 직접 목격한 며느리도 독실한 불자가 되었다고 한다.  

불보살의 지극한 가피 광명이 우리 중생의 눈을 뜨게 해주셨지만 사실 육체의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피가 있다. 그것은 지혜의 눈을 환하게 밝혀주는 깨침의 가피이다. 육체의 눈도 소중하지만 그보다도 더 소중한 눈이 마음의 눈이다. 몸뚱이의 눈만 뜰 줄을 알지 마음과 지혜의 눈을 뜰 줄 모른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의 눈일 뿐이다.

불보살의 가피는 지혜의 눈도 밝혀주는 깨달음의 묘약이다.

불자들이라면 달달 외우는 ‘천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智慧眼), 원하옵건대 제가 지혜의 눈을 빨리 얻게 해 주옵소서.”

후위(後魏, 440~534) 시대 때에 영변(靈辯)이라는 스님이 계셨다. 출가하여 불법을 닦아 익혔지만 수행의 진척이 더디기만 했다. 홀연히 생각을 크게 일으켜서 몸을 아끼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계시다는 오대산에 들어갔다. ‘화엄경'을 묶어 머리에 이고는 오대산 봉우리를 밤낮으로 돌며 염불하였다. 발이 부르터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3년이 지나고 어느 날 저녁 소나무에 걸터 앉아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환하고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어디선가 스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노력과 간절한 신심(信心)으로 그대 마땅히 삼매에 들어가리라.”

그리고 영변 스님의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그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보든지 막힘없이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화엄경’의 해설서 100권을 지었고 세상에 널리 불법을 펼치니 그 시대를 대표하는 큰 선지식이었다. 훗날 스님은 오대산에서 입적하였다.

불보살은 두 개의 큰 광명이 있다. 자비 광명과 지혜 광명이다. 자비의 광명은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중생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 지혜의 광명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주고 중생의 지혜를 성숙시켜준다.

부처님을 ‘눈을 뜨신 분’이라고도 부른다. 마음의 눈을 뜨신 분이다. 깨침의 눈을 뜨신 분이다. 우리도 눈을 떠야한다. 깨침의 눈을 떠야 한다. 마음의 눈을 번쩍 뜰 때, 비로소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화엄경’에서 이와 같이 노래한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다.”
깨달음이야말로 곧 진정한 부처님의 가피이다.

광우 스님 마음수행법회 지도법사 kgk515@hanmail.net

 

[1533호 / 2020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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