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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불선원장 각산 스님

“마음이 평온하면 불안·두려움 본래 없다는 진리 알 수 있어”

마음 안에 본래 지혜 있기에 번뇌 나와도 한 생각 돌리면 지혜 
코로나19가 불러 온 거리와 멈춤이 뜻하지 않게 건강 불러와
스스로 믿으며 수행해 마음능력 개발하면 내 안의 힘 나올 것

참불선원장 각산 스님은 온라인 유튜브 ‘참불선원TV’를 통해 봉행된 금요참선법회에서 마음의 힘을 강화해 코로나19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것을 당부했다.
참불선원장 각산 스님은 온라인 유튜브 ‘참불선원TV’를 통해 봉행된 금요참선법회에서 마음의 힘을 강화해 코로나19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것을 당부했다.

“마음을 어떻게 쓰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뀝니다.” 

이 주장이 담긴 대승불교의 유식론은 놀랄만큼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리학 중에서도 양자물리학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상호 연결이 되어 있기에 불교에서는 “번뇌 즉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번뇌가 어떻게 보리일까요? 고통이 있을 때 그 고통은 행복으로 바뀝니다. 가장 큰 고통이, 불안이 가장 큰 행복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연적 순환 과정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고통의 상처가 깊을수록 감정의 농도도 짙어집니다. 즉 강력한 치유의 힘이 그 마음의 본 자리, 자성불(自性佛)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禪)명상은 “마음이 부처”라고 이야기합니다.

생각은 마음의 부산물입니다. 마음 안에는 무한한 보배창고, 지혜의 능력을 원래 갖추고 있기에 생각이라는 번뇌가 나와도 그 한 생각을 돌리면 바로 지혜가 됩니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이나 현자의 마음이나 성자의 마음이나 부처의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내가 중생의 마음으로 쓰면 중생이지만, 깨친 자의 통찰이 열리면 바로 부처의 마음을 쓰기 때문에 “중생이나 부처가 같다”라고 합니다.

불교가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분이 있습니다.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 수행이 바로 우리를 해탈과 열반으로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불법 만나기도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인데, 정법 만나기가 쉽겠습니까? 정법 만나서 수행하기는 더욱 쉽지 않습니다. 정법을 만난 분들이 번뇌 즉 보리, 중생이 부처, 이런 표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더 쉽게 이야기하면 시련 속에서 모든 경험치를 갖추기 때문에 ‘시련이 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행복’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코로나19가 오히려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합니다. 지혜 있는 자에게 코로나가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 지혜에서 보면, 별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안심하고 평온한 것은 평소 자기의 수행력에 따라 다릅니다. 지식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불안과 공포를 조금 낮출 힘은 있겠지요. 그런데 현자나 성인의 수준이 되면, 불안과 공포는 내 안에 원래 있지 않다는 도리를 알기 때문에 설령 생각이 피어오르더라도 불안함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시련은 힘’이라는 표현에 대칭시키면, 코로나는 우리를 더욱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여유를 주었습니다. 코로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별것 아닙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기침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습니다. 몸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을 때 밥알이 튀는 것을 보니 70cm 정도 튑니다. 비말이 튀더라도 2m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햇빛에 비추어보면 비말의 양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허공 속으로 사라집니다. 혹시 밀집된 곳에 있을 때도 서로의 간격이 2m가 넘는다면 코로나는 침투하지 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장례식장의 장례식 비율이 20% 줄었다고 합니다. 평소보다 20% 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손을 잘 씻으면서 위생관리가 더욱 철저해진 것입니다. 또 병원에도 잘 가지 않습니다. 평소 몸이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서 이 약, 저 약을 먹습니다. 그렇다 보니 몸이 항생제에 길들여져 진짜 아플 때 항생제를 먹어도 듣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을 멀리하고 잘 가지 않으니 오히려 항생력, 면역력이 증가해 건강 수치가 더 높아진다고 합니다. 

공포, 불안, 두려움을 변형시키는 힘이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이 역량이 내 안에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믿으면 무한한 힘이 나옵니다. 경각심은 갖되 위축감을 갖지 않는 것이 중도(中道)의 도리입니다. 

사바세계에서 존재의 몸을 받으면 고통받고 불안한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가 일어나고, 이것보다 더한 일도 일어납니다. 지금은 총성 없는 전쟁과도 같습니다. 지금 전 세계 수만명이 목숨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려워만 할 일이 아닙니다. 위생, 마스크를 철저히 하고 사회적 거리만 두면 됩니다. 

고통받고 불안한 환경은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안을 대하는 마음가짐만 돌려쓰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중생이 되고 부처가 됩니다. 이 마음은 무량광불의 법신불이요 보신불이요 화신불입니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그런 양자, 마음, 그것을 갖고 있기에 내가 개발만 하면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삼신불이 내 안에 있는데 코로나가 무슨 걱정입니까? 현실을 알고 당당히 해쳐 가면 그 어떤 외적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바로 불법 수행입니다. 불안한 감정이 내 몸에 있으면 심장박동이 불규칙해지고, 면역력이 저하되어서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을 초래합니다. 이 파워풀한 마음의 힘, 에너지는 21세기 최신 이론에도 많이 부합되어서 많은 학자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불법의 참선 수행, 불교 명상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면역력을 강화하는 건강에 이로운 조건을 생성해 생명에 해로운 감정을 퇴치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만난, 또 정법을 만난 복덕입니다. 

몸이 습관들도록 해야 합니다. 하루 한 번씩 기도하고 참선하면 생활 전반이 주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참선이 곧 진정한 기도입니다. 마음의 활동을 가만히 보십시오. 마음은 생각, 느낌, 기억으로 구성됩니다. 마음의 활동에서 마음의 힘은 바로 지금 알고 보는 것, 사띠(sati)입니다. 지금 이것을 놓치면 마음의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삶의 질을 개선하는 실천적 철학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실천적 철학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정기적으로 명상 수행을 하면서 마음의 고요함을 이끌어주는 깊은 차원의 평온을 체험했을 때, 여러분은 제가 드리는 말씀을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 실천 철학, 바로 팔정도 수행은 부처님께서 성불수행하신 안반선(安般禪), 즉 아나빠나사띠 호흡 명상과 간화선, 이 두 수행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쌍으로 되는 참선 명상입니다. 

그냥 자기 스스로 믿으십시오. 내 안에 무한한 에너지가 있다고, 체험하기 이전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믿으면 저절로 무한한 에너지가 나옵니다. 업보(業報) 타령을 하시면 안 됩니다. 업보는 받아야 합니다. 좋은 일의 씨를 뿌리면 좋은 결과를 맺고 나쁜 씨를 뿌렸으면 나쁜 결과를 받아야 합니다. 살생하면 살생의 과보가 생기고 나쁜 일을 했다면 그 결과를 받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저지른 것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업장(業障)은 업보와는 다릅니다. 업장은 내가 지은 행위에 의해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과 지혜로 예방하고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업보도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신기하게 고통이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그 자리가 행복이고, 행복은 만족성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하나하나 풀리고 아쉬운 것도 없어집니다.

생각의 씨앗이 행동이 되고, 행동의 반복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업이 됩니다. 습관이 생각으로 이루어졌지만, 생각은 마음이 아니기에 절대 마음은 물들지 않습니다. 불안, 공포, 잘 산다, 못 산다, 이 전부는 한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바로 이 자리에서 사라집니다. 

불교 수행은 마음능력개발이라고 합니다. 무한한 힘을 갖고 있는 이 마음의 에너지를 자신이 갖고 있으면서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에 와서는 여래장(如來藏)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말로 불성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데, 그 마음은, 내가 중생인데 왜 자꾸 부처라고 하는가, 마음의 속성이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이 지구에는 지하수가 본래 존재합니다. 지하수는 파야 올라옵니다. 내가 파서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처럼 미망에 사로잡혀서 불법을 만나지 못하면 무명 속에서 바라고 애착하는 그것 때문에 중생심이 나옵니다. 바라고 애착하고 탐욕하고 증오하는 이 마음만 내려놓으면 그냥 행복 그 자리입니다. 

실직한 사람은 직업을 따질 처지가 못 됩니다. 굶주리면 음식을 가리지 못하고 헐벗으면 옷을 고르지 않듯이 생존에는 곤경을 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작금의 코로나, 이 곤경에 굴하지 않고 인욕과 절제력으로 벗어나십시오. 인욕과 절제력이 있는 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 환경이 자기를 침범하게 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 번, 무조건 앉으십시오. 앉으신 분은 행주좌와에 항상 놓치지 않고 앎과 봄이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1534호 / 2020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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