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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기자명 현진 스님

더 이상 위 없는 여래와 동등한 깨달음

한문 번역으론 ‘무상정등각’ 표현
결국 핵심이 되는 의미는 ‘깨달음'
구마라집, 의역으로 더 선명하게 

제7 무득무설분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수보리여! 네 생각엔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고 여기느냐?”라고 물으신다. 수보리는 당연히 “제가 알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할 만한 그런 법은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있으니, 여래께서 그럼 무엇을 증득했느니 못했느니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증득하였느니 혹은 증득하지 못하였느니 하는 상대적인 유무로 답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 무(無)인 공(空)으로 답한 셈이다.

그렇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범어를 풀어보면 ‘an[否定]uttarā[위]+samyak[적절한]saṁ[동등한]bodhi[깨달음]'이며 뜻풀이로는 ‘더 이상의 위가 없는 적절하고도 동등한 깨달음’이다. 더 이상의 위가 없으니 무상(無上)이요, 적절하고도 동등하니 정・등(正・等)이며, 깨달음이니 각(覺)이기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옮긴 것이다. 결국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중심이 되는 단어이자 의미는 ‘bodhi(菩提, 覺, 깨달음)’이며, 나머지는 그 깨달음이 어떤 유형인지를 설명해주는 내용들이다.

‘anuttara’는 ‘위 없는’이니 더 이상이 없는 최상이라는 뜻으로써, 부처님을 무상사(無上師)라 일컫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samyak’은 적절하다는 의미인데, 우리말에서 적절함이 적당하다거나 대충 맞춤이란 의미로 쓰이는 것과는 약간 다른, 어떤 환경에서도 완벽한 상태가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한문 정(正)은 본디 征(정벌하다)의 원래 글자인데, 그래서 예를 들어 ‘정각(正覺)’이라하면 단순히 ‘바른 깨달음’이란 의미라기 보단 ‘수행을 통해 바루어가다 얻게 되는 바른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saṁ’은 브라만교에서부터 절대상태 혹은 절대존재와 동등하다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불교에선 여래와 동등하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의미를 풀어쓰면 “더 이상의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끝없는 바룸을 통해 얻게 되는 바른 것으로서, 여래와 동등한 수준의 ‘깨달음’”이 된다.

그런데 범어 ‘anuttara­samyaksambodhi’는 무득무설분에 처음 등장하지만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본에는 '아누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가 제2 선현기청분에 이미 한 차례 등장한다. 기실 해당 부분의 범어는 ‘bodhisattvayānasamprasthita'로서 현장 스님에 의해 ‘발취보살승자(發趣菩薩乘者)’로 번역된 단어이다. 그 의미는  ‘bodhisattva[보살]yāna[수레]samprasthita[萬行하는]'으로서, 대승보살의 수레를 타고 수행을 하는 상태 또는 그런 수행자를 말한다.

그러면 왜 구마라집 스님은 ‘발취보살승자’를 ‘發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번역하였을까? 보살이란 의미는 초기에 ‘깨달음[bodhi]을 추구하는 중생[sattva]’이었다가 대승불교가 정착하며 흔히 일컫는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처럼 ‘깨달음[bodhi]을 이미 이룬 중생[sattva]'으로 변화하였다. 선현기청분에서 ‘보살의 수레'라 함은 깨달음을 이미 이룬 중생인 대승보살이 이끄는 수레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범어  ‘bodhisattvayānasamprasthita'의 뜻은 ‘대승보살의 수레를 타고 해탈을 위한 머나먼 수행의 길을 떠나는 자’이니, 그와 같은 수행자라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해탈을 위한  ‘위없고 바르며 동등한 깨달음'인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이 구마라집 스님은 범어원문의 문구에 구애받지 않고 그 내용을 곱씹어 온전히 소화해낸 내용으로 글을 옮겼다. 성인의 말씀을 담은 경전에서 약간은 터부시되는 의역(意譯)을 과감하게 실행함으로써 ‘금강경’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한 것이다.

다르마(dharma)란 말보다는 법(法)이란 말이 눈에 익숙한 반면, 지혜(智慧)란 말보단 반야(prajñā)란 말이 귀에 익은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불교의 중요술어 가운데 뜻옮김한 것과 소리옮김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가 조금이라도 친숙한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무상정등각'은 둘 모두 낯설지 않다. 소리옮김한 것은 마치 진언이라도 되는 양 소리를 들어 곱씹고, 뜻옮김한 것은 그 내용을 읽어 곱씹는 동안 어느 것 할 것 없이 우리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34호 / 2020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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