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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즐거움

  • 법보시론
  • 입력 2020.05.06 10:27
  • 수정 2020.05.06 18:02
  • 호수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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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저렇게 곱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캠퍼스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오색연등 행렬이 만들어낸 장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시각 동악은 형형색색 연등들이 마치 야단법석이라도 벌이고 있는 듯하다. 신기하게도 시끌벅적한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가끔 적막을 깨고 지나가는 조용한 바람소리 외에는 불현듯 신심이 솟구쳐 오른다.

두 학기 째 불교한문아카데미 소속 기본과정 수강생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인스님들 틈에서 말 그대로 초발심자의 자세를 가다듬고 있다. 다만 의욕은 있지만 예습과 복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 가르치는 선생님들께는 항상 죄송할 따름이다. 몰랐던 것을 아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서서 가르치는 것보다 앉아서 배우는 것이 얼마나 속편한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었고 하심(下心)은 덤으로 얻었다. 성현들의 가르침이 갖는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불교한문아카데미에 등록한 것은 참으로 잘한 선택이란 생각이 든다. 정년을 앞둔 나이에 언감생심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전의 가르침은 언제 들어도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는 감동의 연속이자 진리의 발견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첫 학기에는 ‘법화경’ ‘범어-한문경전강독(사소성지)’ ‘한문문법’ ‘구사론’ ‘벽암록’을 들었고, 이번 학기에는 ‘아함경’ ‘범어-한문경전강독(금강경)’ ‘논어’ ‘구사론’ ‘삼국유사’를 수강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한 불교교양인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불교한문아카데미와 강사진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감사인사를 전한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 원격수업을 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인터넷 공간을 통해 알고 지내던 같은 반의 도반들도 직접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설렘이다.

1년 전 나는 세상의 이치를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값진 경험을 했다. 학교행정의 책임자가 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에 대한 인연법의 엄중한 경책이었다. 자리를 얻을만한 공덕도 쌓지 않았으면서 욕심만 앞세워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상응하는 조치였다. 누가 보아도 미혹의 업보였다. 경솔했다. 정말 뭘 몰랐다. 선거도 평소 생각대로 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나는 ‘옳다’고 생각했지만, 남들은 ‘틀렸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내가 틀리고, 그들이 모두 옳았다. 범부중생도 이런 범부중생이 없었다. 나에겐 오직 성찰하고 참회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도피처(逃避處)를 찾아 나섰다. 때마침 불교한문아카데미에서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이 떴다. 곧바로 달려가 수강신청을 했다. 교내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학비도 반액으로 깎아줬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3시간씩 15주 과정이었다. 일과가 끝나고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수업에 들어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혼미했다. 처음엔 계속 다닐 수나 있을까 싶었다. 처음 본 한문문장은 무슨 암호문 같았다. 문법은 있으나마나 했고 품사의 변화무쌍한 변화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학부생처럼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도 치러야 했다. 부담이 적지 않았지만 중도포기는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었다. 수업은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다. 동시에 사회적 만남의 자리들도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대신 오랜만에 ‘배우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덩달아 행복해졌다. 도피처로 여겼던 곳이 도피안(到彼岸)이 되었다. 요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성숙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좋은 스승들과 삶의 지혜를 나누는 기쁨을 날마다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도 공자의 말처럼 ‘배우고 또한 때때로 익히면서’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배우는 즐거움을 향유하고 있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가수 조동진의 노래가사 그대로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36호 / 2020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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