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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마장’의 종류와 ‘불이(不二)법’

기자명 선응 스님

정법엔 본래 천마‧음마‧번뇌마 없어

틀 없는 게 도…분별은 마군
마군의 경계는 꿈같은 일일 뿐
편견 집착하면 불법 증득 불가
과거‧미래 망념이 없어야 반야

20장은 “저절로 생각나는 마음은 ‘천마(天魔)’이고, 현재 생각나지 않은 마음은 ‘음마(陰魔)’이며, 혹은 생각나거나 생각나지 않는 것은 ‘번뇌마(煩惱魔)’이다. 그러나 우리 정법(正法)중에는 본래 이와 같은 일이 없다”이다.

‘경덕전등록’에서 지관(止觀)을 강설하는 어떤 스님이 대주혜해(大珠慧海, 9세기)에게 ‘선사께서는 마를 가려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위와 같이 답했다. ‘천마’는 ‘루탄경’에서 “‘욕계’와 ‘색계’의 중간에 ‘마궁’이 있는데 ‘성인의 길’을 가는 사람을 질투해서 돌을 갈 듯이 공덕을 무너뜨리게 한다”고 한다. 수행이 깊어지면 이만하면 되었다고 게으르게 되거나 장애의 경계를 만나서 포기하거나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음마’는 몸의 기관으로 감수하여 지각하고 분별해서 기억하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陰)으로 ‘탐‧진‧치’를 생하게 한다. ‘정법’이란 부처님의 ‘위가 없는 바른 깨달음’이다. 

‘대지도론’에서 “‘정각(正覺)’은 ‘둘이 아닌 것’을 깨달아 평등성에 들어 청정하고 여실한 지혜이다. 이 ‘정법’에 든 사람은 ‘마음’이 항상 동하지 않아서 세간의 복을 탐하거나 투쟁에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대보살은 ‘정법위(正法位)’에 들어서 신통을 구족하고 불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시방 부처님의 세계에서 모든 선근을 심는다. (중략) ‘보살’이 이와 같이 주해서 여러 가지 마의 일이 생기하면 깨닫고 방편의 힘으로 마군의 일과 집착을 따르지 않고 의심도 없고 후회도 없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이 없기 때문이다”고 한 것과 같다. 

서산대사가 평하시기를 “대개 ‘기틀이 없는 것’이 ‘불도’이다. 분별하는 것은 ‘마군’의 경계이다. 그렇게 마군의 경계는 꿈같은 일이니 어찌 수고롭게 판단해서 말하겠는가?”고 했다. ‘기(機)’는 마음의 계략, 움직임이다. 황벽희운(黃檗希運, ?~850)은 “‘조사(祖師)’ 문중에는 단지 마음을 쉬고 견해를 잃는 것을 논한다. 그래서 마음을 잊으면 불도가 융성하고 분별하면 마군이 치성한다”고 했다. 

21장은 “공부가 만일 마음과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비록 지금 당장 투과할 수 없을지라도 ‘안광락지(眼光落地)’때에 악업에 이끌리게 되지 않는다”이다. ‘타성일편’은 주객이 하나가 되는 것인데, ‘대혜어록’의 설이다. 

‘오등회원’에서 “노승 40년 동안 한 덩어리가 됐다”한 것과 같이, ‘벽암록’에서 “오래 정진하면 길고 짧고 좋고 좋지 않은 것에도 하나가 되어 다시 다른 견해가 없다”하고, 천목중봉(天目中峰, 1243∼1323)은 “화두를 들고 온몸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 완전히 견고해서 파괴할 수 없는 경지)’이 되어 ‘주객’에 대한 대상이 없다”고 한 것과 같다. ‘안광락지’는 ‘임종’의 때다. ‘벽암록’에서 “어느 날 ‘눈빛이 땅에 떨어지는’데 임박해서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손과 다리를 어지럽고 바쁘게 다녀도 네가 허풍떨며 큰 소리로 말할 곳이 없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평하시기를 “‘업(業)’은 ‘무명(無明)’이다. ‘선(禪)’은 ‘반야(般若)’다. 밝음과 어둠이 서로 적이 아니다. 이치가 당연히 그렇다”고 했다. ‘업(kamma)’은 고대 인도에서는 ‘제사의식’이지만,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발생하는 원인이다. ‘선정(禪定)’을 ‘육조단경’에서는 “밖으로 현상을 떠나면 ‘선’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고 한다. ‘반야’는 ‘명(明)’이고 ‘무명’의 반대다. 즉 ‘심경’에서 ‘선정삼매(行深)’로 ‘둘이 아닌(不二) 공’을 깨닫는 ‘지혜’이다. 

‘대지도론’에서 “불법은 편견으로 집착해서 증득할 수 없는 법이다”고 하며, 청량국사(淸凉澄觀, 738-839)가 ‘화엄심요법문주’에서 “‘일념’으로 밝고 또렷한 마음으로 적정하게 비추어 과거 미래의 ‘망념’이 없는 경지가 반야다”고 하고, ‘화엄경소초’에서, “‘일념’도 생하지 않으면 부처다”고 설한 뜻이다.

선응 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 sarvajna@naver.com

 

[1536호 / 2020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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