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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㊼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①

신라인은 자신들 역사 3기로 구분하는 역사의식 성립돼 있어

위홍 각간과 대구화상이 편찬한 향가집 ‘삼대목’을 통해 확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도 3기 구분…유‧불 관점 따라 내용 차이
논란 되고 있는 골품제의 이해와 성골설의 정치적인 의미 점검

경주 전경.출처=경주시
경주 전경. 출처=경주시

지금까지 46회에 걸쳐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라는 주제로 신라 ‘중고(中古)’ 시기 불교의 수용과정과 사회적 역할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았다. 이제 내용을 종합하면서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불교가 담당했던 역할, 특히 왕권의 신성화와 정통성 확립에 기여했던 불교의 역할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신라는 3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선진국이던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해 3국통일을 달성하였고, 이어 3국의 문화를 종합하여 고대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리고 건국한지 992년 만에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나, 다음 시대를 담당할 새로운 주체세력을 양성해 냄으로써 사회전환과 문화변동을 자체적으로 훌륭하게 이룰 수 있게 하였다. 거의 1000년 가까이 장기간 존속했던 신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신라인 자신들에 의해 3기로 구분하는 역사의식이 성립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즉 신라말기인 51대 진성여왕 2년(888)에 각간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에 의해서 편집된 향가집(鄕歌集)의 이름을 삼대목(三代目)이라고 붙였던 것을 볼 수 있는데, 국가의 멸망을 앞둔 시점에서 신라인 자신들이 이미 자기역사를 초기・중기・말기의 3기로 구분하고 자신의 시대를 말기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기・전성기・쇠퇴기 등 3기로 구분하는 신라말기의 역사관은 불법전승의 역사를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 등 3기로 구분하는 불교역사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관은 최초 이상적 시대에서 점차 타락해 말기 나쁜 시대로 나아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기에 대한 인식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신라역사를 3기로 구분하는 내용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신라사의 시대구분법으로는 2종이 알려졌는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각기 전해주는 것이다. 먼저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를  상대(上代 : 1대 박혁거세거서간〜28대 진덕여왕), 중대(中代 : 29대 태종무열왕〜36대 혜공왕),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의 3기로 구분하였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사를  상고(上古 : 1대 박혁거세거서간〜22대 지증마립간), 중고(中古 :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하고(下古 : 29대 태종무열왕〜56대 경순왕)의 3기로 구분하였다. 이상 2종의 역사서는 공통으로 3기로 구분했지만, 그 구분 내용에서는 상당한 차이점을 나타내주고 있어 주목된다. ‘삼국사기’의 상대・중대・하대의 3기 구분에서 방점을 찍은 시기는 중대라고 할 수 있으며, 반면 ‘삼국유사’의 상고・중고・하고의 3기 구분에서 방점을 찍은 시기는 중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의 중대는 삼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유교정치이념을 받아들였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신라의 전성기로 평가하여 중대라 칭하고, 그 이전 상대를 성장기, 그 이후 하대를 쇠퇴기로 인식한 것은 유교적인 역사관에서 볼 때는 타당성을 가진 견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의 중고는 국가발전과 왕권강화의 과정에서 불교가 주역을 담당하였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신라의 전성기로 평가하여 중고라 칭하고, 역시 그 이전 상고를 성장기, 그 이후 하고를 쇠퇴기를 인식한 것도 불교적인 사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일면 타당성을 가진 견해로 볼 수 있다. 물론 불교사상사의 입장에서는 ‘삼국사기’의 중대를 쇠퇴기로 볼 수는 없으며, 불교대중화와 불교철학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오히려 전성기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지만, 사회사의 입장에서 불교의 정치적 역할과 승려의 선구자적 위상을 위주로 하여 평가할 때에는 ‘삼국유사’의 중고가 더 높게 평가될 수도 있다고 본다. 결국 ‘삼국사기’의 중대와 ‘삼국유사’의 중고 가운데 어느 시기를 전성기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유교사관과 불교사관의 입장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유학자인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불교승려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 사이의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사를 3기로 구분한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각각 처음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고, 이미 신라말기부터 전해지고 있던 여러 시대구분설 가운데 김부식과 일연의 입장에 따라서 달리 취사선택하였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시기구분은 각기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며, 2종의 시기구분을 종합하면 신라사는 4기로 구분될 수 있으며, 근대 역사학에서 ‘삼국사기’의 상대를 다시 나물마립간 시기를 중심으로 2기로 나눈 것을 포함하면, 신라사 전체는 5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즉   1대 박혁거세거서간〜16대 흘해니사금,  17대 나물마립간〜22대 지증마립간,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29대 태종무열왕〜36대 혜공왕,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등 5기로 구분하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 되었으며, 이러한 구분에 따라 신라의 발전과 쇠퇴과정을 훌륭히 이해하여 왔다.

이상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의 신라사의 시기구분은 근본적인 역시인식의 차이를 보여주지만, 구분의 시점이 일치하는 것도 없지 않다. ‘삼국유사’의 중고가 끝나는 시점과 ‘삼국사기’의 중대가 시작되는 시점, 즉 28대 진덕여왕대(647〜654)에서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로 바뀌는 654년의 시점이다. 이 시점을 구분점으로 설정하면 신라사는 전기와 후기로 뚜렷이 구별되는데, 삼국분립기의 신라와 삼국통일기의 신라로 나뉘어 가장 중요한 구분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이 시점을 시기구분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오직 왕실의 골품이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바뀌었다는 사실뿐이다. ‘삼국사기’는 진덕여왕 8년(654) 3월조에서,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책 연표 박혁거세거서간 즉위원년조에서, “이로부터 진덕왕에 이르기까지는 성골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태종왕 춘추 즉위원년조에서, “이로부터 이하는 진골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삼국유사’는 왕력(王曆) 선덕여왕조에서, “성골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하였다”라 하였고, 또한 진덕여왕조에서, “이상은 중고로서 성골이고, 이하는 하고로서 진골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진덕여왕까지는 성골, 태종무열왕부터는 진골이라고 하여 성골의 하한에 대해서는 두 역사서의 내용이 일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골의 상한에 대해서는 두 역사서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시조 박혁거세거서간으로부터 진덕여왕까지 상대의 28대왕의 신분이 모두 성골이었다고 하였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성골은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의 중고 시기의 6대왕으로 국한하였다. 두 역사서에 나타난 상한 시기의 차이는 진덕여왕 이전의 시기를 ‘삼국사기’에서는 상대라는 한 시기로 설정한 것에 비해 ‘삼국유사’에서는 상고와 중고라는 두 시기로 구분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성골의 상한보다 하한의 문제, 즉 진덕여왕대 성골의 소멸과 진골인 태종무열왕으로의 왕통(王統)의 교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골품제도는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지던 것이며,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인하여 신라사 이해의 핵심적인 주제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골품제도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라는 각기 별도의 체계를 이룬 제도가 하나의 체계로 통합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골품제도 가운데서 특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주제는 성골과 진골의 문제였다. 성골과 진골의 구분 문제가 핵심이 되어 그 구분의 기준과 원인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성골의 소멸과 진골로의 왕통의 교체사실을 전제로 하여 성골과 진골의 차이점을 밝히려는 노력으로 집중하였는데, 그러한 관심은 성골의 강등설(降等說)과 상승설(上昇說), 분화설(分化說)과 소멸설(消滅說), 그리고 실재성(實在性) 부인과 후대 추존설(追尊說)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한국학자들은 모두 성골의 실재성을 전제로 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재성을 부인하는 주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골과 달리 성골에 대해서는 소멸에 관해 언급한 단편적인 문구 이외에는 어떠한 설명 자료도 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추측성의 주장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다양한 접근방법에 의한 해석은 골품제, 특히 성골의 이해 수준을 상당히 높여주는데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가까운 시일에 논란이 쉽게 해소될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고 본다.

본고에서 내가 원래 밝히려는 것은 골품제 문제 자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성골의 문제로 출발한 연구도 아니었다. 나는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의 관계, 특히 왕권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에서 불교가 담당했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중국 선진문물의 수입과 고대문화의 건설과정에서 불교 승려들이 담당했던 선구자적 역할 등 두 문제를 추적해 오는 작업과정의 일환으로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의 진종설(眞宗說)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본고의 접근방법으로서는 우선 성골과 진골의 관계, 그리고 성골의 실재성 여부 같은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관점을 달리하여 거시적으로 중고 시기 국가의 발전과 불교의 관계를 추구하여 왔다. 이제 그 동안의 논의 내용을 종합하는 구체적인 이해방법으로서는 첫째 중고 시기 왕위계승과정과 용수-춘추 부자의 혈통과 정치적 위상, 둘째 중고 시기 왕권강화와 지배체제 정비과정, 셋째 중고 왕실의 신성화와 불교 진종설, 넷째 중대 왕실의 정통성 강화와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출자설 등으로 장절을 나누어 정리하려고 한다. 그리고 부록으로 하대 진성여왕의 등장과 ‘골상(骨相)’ 관념의 검토를 통하여 중고 시기의 성골 관념과 비교함으로써 성골설의 정치적 의미를 거듭 점검해 보려고 한다. 본고는 성골과 진골을 중심으로 하는 골품제에 대한 연구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왕권의 신성성과 성골 개념, 그리고 성골에서 진골로 교체되었다는 사실의 역사적 의의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39호 / 2020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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