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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당선작] 할머니 불자로서 삶 감사…마지막까지 기도하다 육신 벗고 싶어

기자명 법보

총무원장상 - 이채순

36년 전 방문한 봉정암…세 칸 남짓 건물 열악한 현실에 불사 동참
기왓장 하나부터 시작…백방으로 화주, 주는 음식도 마다 않고 싸와
아픈 몸도 장대비도 기도하면 해결…매일이 봉정암 부처님의 가피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나는 76세 할머니 불자다. 올봄에 설악산 봉정암에서 회향할 일이 있었다. 나는 봉정암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35년 다녔다. 그러나 이제는 늙어 어렵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가서 회향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병마가 오는 바람에 법보신문에 회향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봉정암 부처님의 가피에 대해 적어본다. 

봉정암에 처음 간 것은 1985년 7월 중순이다. 도반 형님들이 봉정암 순례를 제안했다. 서울 형님, 부산 형님, 여기저기서 여덟 명이 함께 봉정암에 올랐다. 산길이 험하고 힘들었다. 길을 잃어 원점으로 다시 돌아와 걷기도 했다. 그렇게 산길을 걸어 11시간 만에 봉정암에 도착했다. 봉정암에는 스님이 한 분 계셨다. 스님은 우리 일행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여기를 찾아온 건 보살님들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당시 봉정암은 양식도 없고, 양초도 없어서 불도 켤 수 없었다. 우리는 다행히 양식과 양초와 반찬을 조금씩 가져갔다. 그래서 저녁을 해서 먹고 불도 켤 수 있었다. 계절은 여름이지만 봉정암의 밤은 손이 시릴 만큼 추웠다. 저녁에는 비마저 추적추적 내렸다. 스님께서 비가 오면 지붕이 새고, 겨울에는 기와가 동파돼 동기와로 교체해야 하는데 신도가 없어 여의치 않다고 걱정했다. 당시 봉정암의 건물은 세 칸에 불과했는데 법당과 방 두 칸이 전부였다. 우리들 생각에도 누가 이 험한 곳에 기도하러올까 싶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기다시피 사리탑에 올랐다. 주위를 돌아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수려한 산, 장엄하고 신비한 바위는 모두 부처님 형상이었다. 환희심이 절로 일었다. 이런 도량에 와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부처님의 가피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행은 불사에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먼저 기와불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했다.

그러나 기와는 구입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스님은 “기와 10장을 지고 올라오는데 운반비가 5만원”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기와 한 장부터 불사를 시작했다. 당시 나는 40세였다. 도반 형님들은 50대 후반, 60대 초반이었다. 봉정암 불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집에 돌아와서 다들 힘껏 화주를 하고, 또 포교까지 곁들여 하며 불사를 도왔다. 동분서주한 보람으로 봉정암 불사는 순조로웠다. 몇 년이 지나자 기와불사는 물론이고 법당불사가 시작됐다. 스님께서 반찬거리가 걱정이라 하면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나물, 참기름, 들기름, 식용유, 미역, 김 등 주는 대로 받아왔다. 환희심에 힘든 줄을 몰랐다. 스님의 크신 원력으로 불사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봉정암 법당 점안식이 있던 날, 험한 산길을 마다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방사가 부족해 마루나 처마 밑에서 밤을 보냈지만 다들 행복해 했다. 우리 일행 네 명도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가마솥을 끌어안고 잤다. 숯장사도 울고 갈 정도로 얼굴이 까맣게 얼룩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당시 서로를 쳐다보며 얼마나 웃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행복한 추억이었다. 후원에서 한번 설거지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 지나야 끝이 났다. 그래도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를 먹고 몸은 늙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하루는 3일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할 정도로 아파서 끙끙 앓는 중에 봉정암에 간 적이 있다. 너무 아파서 봉정암 사리탑에 올라 엉엉 울었다. 그리고 하소연했다. “부처님 이제는 봉정암 못 오겠습니다.” 그러자 탑에서 소리가 들렸다. “여기를 봐라. 내가 자장율사다. 아직은 안 된다.” 깜짝 놀라 탑을 보니 수염 긴 스님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부처님”하고 벌떡 일어나는 순간 사라졌다. 법당으로 내려오는데 신기하게 몸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로 아픔이 신기하게 사라졌다. 물론 봉정암에 가는 길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봉정암에 간다고 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안내를 했다. 

나는 ‘무설회’라는 모임을 하고 있다. 시작할 땐 20명이던 회원이 이제 100명을 훌쩍 넘었다. 정월달에는 무조건 첫째 주 초삼일에 양산 통도사 새벽예불, 둘째 주에는 오대산 적멸보궁, 세째 주에는 태백 정암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넷째 주는 삼대 관음도량 순례를 마치고 다시 4월 넷째 주에 봉정암에 가서 오대보궁 삼대관음도량 기도를 회향하고 매달 넷째 주에 전국 어느 사찰이던 회원들이 원하는 곳으로 순례를 한다. 모두 다 신심은 돈독한데 시간이 없어서 재적사찰에 자주 못 가는 불자들이다. 

2012년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4월 넷째 주에 봉정암을 가는데 비가 내렸다. 위험한 산길이라 걱정을 하면서 출발했다. 그때는 이상하게도 순례 가는 날이면 항상 날이 궂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결심했다. “오늘은 부처님께 기도를 제대로 한 번 해보자.” 백담사를 출발해 영시암에 가서 부처님 전에 삼배 올리고 회원들을 먼저 올려 보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1시간을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 “부처님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 ‘무설회’가 순례 가는 날마다 날이 궂어서 불편합니다. 저는 이제 봉정암 법당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묵언하면서 올라 갈테니, 앞으로는 비가 오지 않도록 해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출발했다. 부슬부슬 오던 비가 갑자기 그치고 햇볕이 났다. 고맙고 감사했다. 봉정암 순례가 이렇게 회향된 이후로 ‘무설회’ 순례 가는 날에는 비가 오다가도 그치는 가피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해 9월에는 남해 보리암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로 방생법회를 떠났다. 배를 예약했는데 전날부터 비가 오더니 당일에는 태풍주의보가 내렸다. 그래도 출발했다. 장대비와 바람에 나무가 쓰러지는 무서운 날씨였다. 나는 우리가 가면 비가 그치고 햇볕이 날거라며 불안해하는 회원들을 다독였다. 그러자 듣고 있던 버스 기사님이 역정을 냈다. 이런 날씨에 무슨 비가 그친다는 말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기도를 시작했다.

“봉정암 부처님 도와주세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1시30분을 꼬박 기도했다. 놀랍게도 목적지에 도착하자 비가 그치고 바람은 자자들면서 햇살까지 내렸다. 회원들은 탄성을 질렀다. 부처님의 가피였다. 예약해 둔 배의 선장이 나와 있었다. 선장은 “못가면 못 간다고 말이라도 하려고 나왔는데 이제는 갈 수 있겠다”며 배에 타라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평생을 배 위에서 살았는데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라고 했다. 원래 세존도를 한 바퀴 도는데 복이 많으신 분들 같아 세 바퀴를 돌아주겠다고 했다. 다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놀랍게도 파도조차도 없었다. 그렇게 방생법회를 마치고 차에 오르려는 순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거센 바람이 불고 장대같은 비가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 뒤로 성지순례 날은 비를 맞지 않았다. 비가 오다가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신기하게도 그치고, 순례를 마치고 차에 오르면 비가 내렸다. 그래서 ‘무설회’ 회원들은 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챙기지 않는다. 

나는 2014년도 8월8일 회원들과 봉정암에서 7일간 용맹정진했다. 졸리면 절하고, 절이 어려우면 참선하고, 참선하다 졸리면 염불을 했다. 그렇게 있는 힘을 다해 7일기도를 원만히 회향했다. 하산하기에 앞서 부처님께 108배를 올렸다. 그런데 그때 신중전에서 환한 빛이 일더니 신장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바세계 중생들아 내 말을 잘 들어라. 기도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일할 때 일하고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잘 때 잠자는 게 기도니라.”

“부처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신장님은 사라졌다. 정신이 퍼뜩 깨었다. 법당을 나와 내려오는데 올라갈 때 보았던 그 산이 아니었다. 온 산하계곡이 천상이요 극락이었다. 나무도 바위도 잘 가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음을 돌리고, 행복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대하면 고맙고 감사하지 않은 일이 없다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됐다. 

나는 윤달 드는 해마다 예수재를 했다. 올해가 열 번째다. 예수재를 시작한 건 1990년 중반이다. 아는 분이 구경 가자고 해서 같이 갔다. 그런데 얼마나 보기가 좋았던지 나는 언제 저렇게 큰 재를 조상님께 지내드릴까 생각했다. 

다시 윤달이 들기까지 3년 동안 열심히 포교하며 봉정암에 지극정성으로 올랐다. 그리고 3년 만에 윤달이 들자 실천에 옮겼다. 가진 돈이 없으니, 한가구당 1백50만원을 정하고 30집을 모연했다. 그렇게 해서 공주 마곡사에서 예수재를 지냈다. 동참한 노보살님들이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 이후로 윤달이 드는 해에는 빠지지 않고 예수재를 했다. 하고나면 조상님께 큰 효도를 한 것 같아 무척이나 행복했다. 이제 올해로 열 번째 예수재다. 회향하고 젊은 불자들한테 인수인계를 해야 되는데 걱정이다. 불심이 효심이고 효심이 불심이다. 

봉정암 불사에 함께 했던 도반 형님들은 돌아가시거나, 살아계셔도 연로해 거동이 힘들다. 그래서 안타깝고 아쉽다. 참으로 신심 장한 대보살들이셨다. 그런데 이제 내가 노보살이란 소리를 듣는다. 후배들한테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배움도 부족하고 내놓을 것도 마땅치 않아 어른 노릇하기가 힘들다. 세월은 가고, 이제 나는 할머니 불자라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할머니답게 살다가 어느 날 조용히 육신의 옷을 벗으려 한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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