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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당선작] 광명진언으로 원망 풀고 아버지 영가에 지혜·자비 가득하길 기원

기자명 법보

전국비구니회장상 - 이란희

20대 후반 방황 끝에 다시 찾은 사찰서 명상수행과 인연 맺어
요양병원 생활하시던 아버지와 가족들로부터 도망치듯 피해
아버지와의 업연, 극락왕생과 업장소멸 10년 발원기도로 풀어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르타야 훔.”

그는 이생에서의 마지막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화장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었다. 전날 밤, 조문 온 법우가 내게 당부를 했다. 화장터로 모시면 마음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를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그때 꼭 기도를 하라는 조언과 함께 네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법우의 말이 맞았다. 기도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양 손에 염주를 꽉 쥐고서 광명진언을 외웠다. 두 뺨으로는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맞이한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그 존재는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가족들은커녕 자신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무기력한 그를 미움과 답답함으로 지켜봐야했던 10대였다. 그의 곁을 떠나 도망치듯 타지로 대학 진학을 했다. 철부지 막내딸은 타지에서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20대를 보냈다. 그 시기는 아버지를 모른 체 하며 살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홀로 생을 정리하고 있었다. 딸과 아버지의 서로 다른 10년의 시간이었다.

내 고향은 경북 청도의 시골 마을이다. 옆 마을에는 비구니 강원 사찰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동네 주민들 대다수가 불자인건 당연했다. 우리 집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어린이 법회를 다녔다. 절에서 뛰어 놀고 스님들과 어울리는 건 일상이었다. 다사다난했던 사춘기 때는 강원의 스님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위로이자 응원이었다.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그 시기에 비구니 스님들은 내게 엄마이자 언니이자 친구나 다름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불교학생회를 이끌며 친구, 선후배들과 법회를 이어나갔다. 수능 100일 때는 혼자 절에서 1박2일 기도도 했다. 당시엔 기도법이라고는 108배 밖에 몰랐다. 그러나 어머니, 할머니 보살님들을 곁눈질 하며 1박2일 기도도 무사히 회향했다. 덕분인지(?) 원하던 대학에 진학을 할 수 있었고 전북 전주에서 대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러나 그 이후로 절과의 인연은 끊어졌다. 

힘들면 종교를 찾는다고는 하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자 걷잡을 수 없이 방황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관계, 진로, 비전 문제 등 또래라면 겪을 수 있는 고민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의 무게는 나를 더욱 더 심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활달하고 낙천적이었던 ‘자신’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은 견딜 수 없었다. 그때 어렸을 적 놀이터였던 절이 떠올랐다. 사건사고가 많았던 그 시절, 내게 가장 힘이 됐던 게 절과 스님들이었다. 그 곳에 다시 간다면 힘듦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그래서 다시 절을 찾았다. 10년 만이었다.

다시 찾은 절은 고향의 그곳과는 사뭇 달랐다. 산속이 아닌 도심 한가운데 위치했고 관광객들로 붐볐다. 새소리, 물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던 목탁 소리는 자동차 소리에 묻히기도 했다. 더군다나 스님들과 편하게 어울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뭔가 모르게 누군가의 품처럼 아늑했던 건 변함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청년회 법회에 참여했다. 스님들의 법문을 빠짐없이 들었고 법우들과 시간을 보냈다. 청년회 법우들과 놀땐 놀면서도 함께 사찰순례며 봉사활동이며 불교 공부를 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특히 ‘모든 것은 연결돼 있으며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결과다’라는 가르침은 단순하지만 깊은 울림이 되어 중요한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 절에 다니면서 겪게 된 가장 큰 변화는 가족에 대한 마음이었다. 대학 진학 후 10년 동안 모른 체했던 건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1남 6녀의 막내딸로 자란 내게는 위로 언니가 다섯, 아래로 남동생이 한 명 있다. 가족은 많았지만 밥이며 빨래며 집안 살림을 하고 아버지와 남동생을 보살펴야 했던 건 내 몫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장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타지에서 홀로 20대를 보냈던 건 가족들로부터의 도피였던 것 같기도 하다. 가족 행사가 있을 때나 명절에는 고향으로 가서 가족들과 어울리긴 했다. 그러나 몸만 함께였을 뿐 마음은 아니었다. 가족에 대한 애틋함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병원에서 홀로 지내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 진학을 한 이후부터 병원으로 모셔졌다. 7남매 모두 아버지를 돌볼 여력이 없었던 이유에서다.

그 무렵 하안거 기도 입재가 시작됐다. 내게는 두 번째 안거 기도였다. 바로 이전의 동안거 기도를 통해서 내게 큰 변화가 있었다. 매일 명상과 함께 ‘금강경’을 독송했다. 그러나 그때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일매일 가족들을 마음에 새기며,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다. 기도 입재 날, 뿔뿔이 흩어져있는 가족  사진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책상머리 위에 붙였다. 옆에는 가장 좋아하는 부처님 사진도 함께 자리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밤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안거 기도가 끝나는 날까지, 사진 속의 사람들이 탈 없이, 보통의 날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중 49일 기도 입재를 앞두고 있었으니 하안거 기도를 반절쯤 보냈을 무렵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난생 처음 겪는 시련이 닥쳤다. 바로 아버지가 계시던 요양병원으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에서 생활하신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소식을 전해 듣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이었다. 그 때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옆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의 눈을 피해서 소리없이 엉엉 울었다. 그동안 아버지를 돌보지 못했던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제는 아버지를 모른 체 하지 말아야겠다며 다짐했었는데…. 이미 너무 늦었다. 한 달 전, 마지막으로 보고 왔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했다. 병상 위에 깡마른 채로 누워있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프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그건 아버지의 업(karma)이었다.

업은 그 무렵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내가 현재 경험하는 것들은 과거 내 업의 발현이라는 가르침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와 아버지의 삶을 비추어 보게 됐다. 대체 아버지는 어떤 업을 지었길래 자신도, 가족들도 보살피지 못했던 걸까. 아버지는 왜 병원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생의 마지막을 보내야 했던걸까. 그리고 아버지는 왜 자신의 업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살아온 지난날을 알고 있었기에 ‘업’이라는 말에 더 사무쳤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원망은 화장터로 이어졌다. 10여 년간 병원에서만 지냈던 아버지에겐 자유로이 여행을 떠나기 위한 마지막 채비의 시간이기도 했다. 법우의 당부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었다.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르타야 훔.”

그렇게 한참 동안 광명진언을 외웠다. 그런데 갑자기 캄캄하고 어두웠던 마음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눈물범벅으로 희미했던 머릿속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지난날의 시간들이 스쳐갔다. 어린 시절 흙냄새를 맡고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절 앞마당에서 쌓은 추억이 떠올랐다. 불법 인연이 시작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돌보던 모습도 스쳐갔다. 나도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은 그때부터 키워졌을까. 대학 시절 만난 좋은 인연들도 떠올랐다. 아버지의 여행길을 배웅하기 위해 전주며 서울이며 저 멀리서 와준 분들이었다. 장례식장을 찾아주신 분들의 수만큼 많은 불보살님들께서도 아버지의 여행을 외호해 주리라, 그런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다시 닿게 된 불법 인연. 스님들과 법우들 또한 아버지의 배웅 길에 동참해주셨다.  
그동안 “나는 홀로 컸어”라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나의 지난 시간들은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되돌아보니 아버지는 지금의 내가 ‘이란희’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분이었다. 나를 태어나게 한 존재로서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원망이 감사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때 다짐했다. 아버지가 홀로 병원 생활을 하셨던 그 세월만큼 좋은 마음으로 많이 베풀고 보시하기로, 그리고 그렇게 쌓인 공덕은 모두 아버지에게 회향하기로. 아버지에게 고마움으로 전하기엔 10년간 쌓일 공덕으로는 턱없이 부족할거다. 그래도 한번 해보기로 다짐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여행길을 배웅할 수 있게 돼 얼마나 다행인건가.   

스님의 안내를 받아 3년 기도를 먼저 계획했다. 매일매일 ‘지장경’을 읽기 시작했다. ‘지장경’은 영가 천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버지가 다음 생에는 더 좋은 몸으로 태어나 선업을 짓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출퇴근길에는 광명진언도 외운다.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에게도 불보살님들의 지혜 자비 광명이 늘 함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년 백중 기도 회향 때는 아버지를 위한 3년 기도 중 1년을 회향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 무렵 희한한 꿈을 꿨다. 아버지가 떠난 후 종종 가족들과 나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었다. 꿈속에서의 아버지는 늘 병상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1년 기도 회향을 앞두고 내 꿈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랐다. 꿈속의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쌩 지나가고 있었다. 스님께 꿈을 말씀드렸다. 너의 기도 덕분에 아버지가 이제는 가장 젊었을 때,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한 게 아니겠냐느고.

아버지가 떠난 후 법당에서 하는 삼배도 달라졌다. 첫 번째는 세세생생 이어질 거룩한 부처님과의 인연에 감사하며 절한다. 두 번째는 어느새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주고 계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절한다. 세 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시는 스님들께 감사하며 절한다. 고두례를 하며 한 가지 더 보탠 게 있다.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다짐, 그리고 내가 지은 모든 공덕은 아버지 영가와 일체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하겠다는 마음이다.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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