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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당선작] 봉사·동국대 진학·신행활동으로 생전 할아버지 사랑에 보은

기자명 법보

동국대 총장상 - 오지승

할아버지 49재 위한 기도는 불교와 인연 맺어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
나란다 불교교리대회서 수상하고 한강무차수륙대재에 동참해 방생도
동국대 불교학부 합격 가장 기쁜 일…제등행렬·불교동아리 적극 동참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때론 엄하지만 그 무엇보다 큰 사랑으로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기억만큼은 어디 가서 “저는 행복하게 자랐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손녀라면 언젠가 찾아올 이별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순간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찾아오고 말았다. 내가 이제 막 고3 수험생이 된 3월의 봄이었다. 나는 그날 학교를 마치고 바로 할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갔고 할아버지께서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다. 할아버지 옆에 누워있던 나는 한참 뒤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알아 이상한 마음에 할아버지를 흔들어 깨워보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으셨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언젠가 결혼하는 모습까지도 보아주실 거라고 믿었던 할아버지께서 주무시는 중에 돌아가신 것이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다가 “지승이 왔니”라고 말하며 지갑을 열어 꼬깃꼬깃한 용돈을 쥐여 주시던 할아버지는 화장을 마치고 흰 가루가 되어 작은 항아리 안에 잠드셨다. 주체하기 힘든 눈물과 함께 항아리를 꼭 안고 향한 곳은 서울의 한 절이었다. 49재를 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평안한 영면을 위해 지금껏 내가 해본 적 없던 간절한 기도를 부처님께 올렸다. 돌이켜보면 당시 할아버지를 위한 기도는 내가 불교와 인연을 맺고 불교적 삶을 살아가게 된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은 내가 인생에서 맞이한 가족의 첫 죽음이었고 너무나 슬픈 일이었다. 입시의 걱정은 생각할 겨를 없이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죽음이라는 감정의 동요가 마음을 떠나지 않던 시기였다. 할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덕을 짓고자 했지만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내게 때마침 ‘불교박람회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를 위한 공덕을 짓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보고자 하던 중 ‘불교’와 ‘봉사’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려 박람회에 참여했다. 불교박람회의 마지막 날에는 박람회장에서 언뜻 보았던 BBS불교방송 부스가 떠올라 ‘만공회’에 가입했다. 이 만공회로 불교방송 법당에 영가 등불을 밝힌 것이 할아버지를 위한 영가 공덕 지어드리기의 시작이었다. 만공회 동참은 영가 등불뿐만 아니라 평소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보던 불교방송이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더 힘쓰고 도움이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불교박람회 봉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나는 다시 학업에 집중했다. 그리고 주말마다 할아버지 생각으로 절에 나가 108배를 했다. 법당을 나오는데 ‘조계사 불교학교 청소년법회’라고 적힌 홍보물을 보았다. 고3이라 청소년 법회 활동을 자주 나오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직까진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하던 때가 아니라 청소년 법회의 문을 두드렸다. 불교학교에 다니고 있던 청소년 법우들과 지도법사 스님, 선생님께서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그해 5월, 고3이지만 서울 연등회 행렬에 참석했다. 연등을 직접 만들고, 청소년 법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고3이 행렬의 맨 앞에서 어린 학생들을 인솔해야 하는 큰 행사였다. 비가 정말 많이 오는 날이라 몸은 피곤했지만, 불만하나 없이 이상하게 너무나 뿌듯한 마음만 들었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불교 활동이 할아버지를 위한 공덕이라 생각했고, 나 또한 청소년 법회 활동을 통해 웃음과 예전의 밝은 성격을 되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등회 이후 부처님오신날에는 청소년 법회에서 지원자를 받아 참여한 조계사 합창단에 참가해 봉축 법요식에서 음성공양을 했다. 그렇게 부처님오신날을 보내는 동안 할아버지의 49재가 끝났다. 

여름이 지나며 본격적으로 수험생으로서의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당시 집안 형편상 본래 꿈꾸어 왔던 진로는 마음에만 간직한 채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던 차에 청소년 법회 선생님과 상담을 나누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동국대 불교학부’로 진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주셨고, 신심 깊으신 할머니의 응원 속에 동국대 불교학부 진학을 목표로 입시를 준비했다. 당시 담임선생님께 동국대 불교학부를 지원하겠다고 이야기하니 처음에는 의아해하셨지만, 집안 상황과 나의 뜻을 고려해 주셔서 입시자료와 면접 준비를 도와주셨다. 입시를 위한 학업성적을 끌어올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기초 불교 지식을 익히기 위한 공부도 병행했다. 마침 서울 동국대학교에서 매년 개최되는 나란다 불교 교리경시대회에 참가했고, 비록 입상이지만 제10회 나란다 축제의 고등부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참 수험생이던 그때, 할머니 손을 잡고 ‘등용문을 오른다’라는 의미에서 잉어 방생 공덕으로 합격을 기원하고자 한강에서 진행한 무차수륙대재 및 방생대법회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수상과 방생 공덕의 기쁨은 잠시, 떨리는 마음으로 수시원서 접수를 시작했다. 면접에 가서는 할아버지가 응원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안고 수험번호로 자기소개를 한 뒤 “한국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호기롭게 말했던 거 같다. 그 후 겨울의 시작을 알리던 11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수시모집에 합격했습니다”라는 합격 통지서가 뜬 화면을 나는 바라보며 뛸 듯이 기뻐했다. 당장이라도 할아버지께 달려가 대학교 합격했다는 말씀을 드리면 기뻐하시며 자랑스러워하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결과였다. 물론 할머니께서도 손녀가 집안 최초로 대학에 입학한 것을 기뻐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노력해줘서 고맙다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입시가 끝나고 그해를 떠나보내는 겨우내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며 학비를 벌고 또 벌었다. 불교장학금으로 학비 문제는 해결했지만 살고 있던 곳과 먼 지역인 경주로 내려가는 것은 생각 보다 부딪쳐야 하는 벽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숙사비와 생활비를 위해서라도 아르바이트에 여념이 없던 때에 조계사 불교학교 청소년 법회 졸업식을 맞이했다. 졸업식 이후 청소년 법회 선생님께서 절의 청년회 소개를 해주셨다. 갓 스무 살이 된 청년으로서의 신행 활동의 시작이었다. 

청년회 입회를 위해 나는 ‘연수원’에 299기로 들어갔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활동은 법주사에서 진행된 동안거 해제 생명 살림 봉사 (방생) 법회를 간 일이었다. 나는 공양간에서 봉사했는데, 함께 간 모든 법우님 들이 행사에 참석한 인파가 많아 힘들지만 내색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봉사에 임했다. 그 모습을 보고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고 마음이 기쁜 불자가 되는 게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연수원 과정을 모두 마치고, 청년회 대학생회로의 회향을 앞두고 있던 날 뜻밖의 전화가 왔다. BBS 불교방송에서 학생 때부터 만공회에 동참한 계기와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 방송을 촬영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를 통해 할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바탕으로 그동안의 신행 활동과 ‘생활 속 작은 보시 실천’의 경험을 전했다. 그렇게 또 한 번 잊지 못할 경험을 남기고 나는 경주에 내려가 불교학부 1학년으로써의 삶을 시작했다. 

공부와 친구 사귀기에 여념이 없던 3월, 꼭 1년 만에 할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왔다. 너무 자랑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가득해서일까. 영묘전에 모신 절에 가 제사를 지내며 할아버지께서 언제나 지켜보고 응원해 주시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왔다. 물론 할머니를 잘 부탁한다는 마음도 전달된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경주와 서울을 오고 가며 많은 신행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경주에서는 ‘형산강 연등 문화축제’에서 불교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장엄 등 행렬에 참여하고, 연이어 서울에서 열린 연등회에 조계사 청년회 장엄 등 끌기에 참여했다. 가피가 넘치던 봉축 기간이 끝난 후에는 조계사 청년회 대학생회의 임원을 맡았다. 이 일은 신행 활동을 넘어 내게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 경험이 되었다. 이후에도 대학교 1학년 생활은 정말 멈추지 않는 불교 에너지로 가득했다. 여름에는 조계사 불교학교에서 열린 수많은 어린이와 함께한 ‘여름나기 물놀이 학교’에 일일 교사로 참여하고, 불교학부에서 얻은 좋은 기회로 법주사에서 진행된 ‘어린이 템플스테이 여름 캠프’에도 참여해 아이들을 인솔하며 지냈다. 

바빴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나는 2020년 지금의 나의 신행 활동과 직결되는 새로운 불연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내가 한국 대학생 불교연합회에서 개최한 ‘2019 KBUF 영부디스트 캠프’에 참여한 것이다. “가치 있는 청춘, 함께하는 우리”라는 구호로 진행된 캠프에서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 불자들을 만나는 것부터가 나에겐 신선함이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대불련 법우들과 연락하며 맞이한 2020년에 나는 망설임 없이 58년 차 중앙집행위원 지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활동은 한 해의 대학생 불자 소통을 책임지고, 신행 활동을 기획 및 진행하며 중앙회장과 함께 바삐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지난 4월17일에는 코로나19로 미뤄졌던 58년차 중앙집행위원 임명식을 했다. 비록 2020년에는 코로나19라는 큰 질병으로 인해 부처님 앞에 나아가고자 기획된 신행 활동들이 많이 축소됐지만, 그에 따라 온라인으로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고 대불련 유튜브를 통해 법우들과 소통하고 있다. 많은 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 절대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처음에는 할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공덕짓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이 생각이 나서 눈물에 앞이 가려졌다. 이제 나는 대학교 2학년이다. 나의 신행 활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런 나의 멋진 모습을 할아버지께서 좋은 곳에서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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