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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사쌍팔배(四雙八輩)

기자명 현진 스님

무아론에 기반해 상을 갖지 않게 하는 가르침

사쌍팔배, 성문승 계위 소개
각각의 계위를 소개했지만 
근본은 아상 극복하는 게 핵심

‘금강경’ 제9 일상무상분에 성문승(聲聞僧)을 수행계위에 따라 넷으로 분류하고 각각을 다시 향(向)과 과(果)로 나눈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언급되어 있는데, 둘씩 짝을 지어 넷이 되기 때문에 사쌍(四雙)이라 하고 통틀어 여덟 계위이기 때문에 팔배(八輩)라고 한다. 특정한 순간에 어디로 향하도록 방향을 틀게 된 것을 향(向)이라 하는데 그 마음은 오직 한 번만 일어나며, 방향이 정해져 나아가다 얻은 결과를 과(果)라 하는데 그 마음은 반복해서 일어난다. 향(向)은 범어로 마르가(mārga, 道, 길)이므로 도(道)라고도 일컫는다.

우선 일래자(一來者) 부분의 구마라집 스님의 한역을 옮겨보면 “사다함은 한 차례 더 갔다옴을 일컫지만 실제로는 갔다옴이 없사온데, 그래서 사다함이라 일컫는다”라는 문장이 있다. ‘사다함’ 또한 ‘갔다옴’이란 의미이기에 ‘①갔다옴을 일컬음 – ②갔다옴이 없음 – ③갔다옴이라 일컬음’이므로 언뜻 보아서는 즉비논리(卽非論理)의 한 유형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해당 문구의 범어원문을 옮겨보면 “일래자(一來者)는 일래과(一來果)를 얻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일래과(一來果)를 얻었다는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래자라고 일컬어집니다”라고 되어있기에, 속제와 진제를 넘나드는 즉비논리(卽非論理)에 의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무아론에 기반하여 상(相, saṁjñā)을 갖지 않도록 하는 가르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를 일으키려는 경전에 한 분(分)을 할애하여 그저 성문승의 계위를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니, 이 또한 약해지려는 무아론을 복원시키려는 ‘금강경’의 요지에서 전혀 벗어나있지 않다. 그럼에도 사쌍팔배의 각 계위별 의미를 해당 범어를 참조하여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흐름에 참여하여 들어갔다는 의미의 예류(預流)는 범어로 ‘srotas[흐름]­panna[들어감]'로서 음역하면 수다원(須陀洹)인데, 해탈로 향하는 성스럽고도 커다란 흐름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수행자가 견도(見道)에 들어가 사성제의 이치를 깨닫고 청정한 지혜를 얻게 되면 예류향(預流向)이라 일컫는데 그제야 예류과를 향해 나아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예류과를 증득하면 더 이상 악처에는 결코 태어나지 않으며, 천계와 인계를 최대 일곱 차례 왕복한 후엔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한 차례 다녀온다는 의미의 일래(一來)는 범어로 ‘sakṛd[한차례]­āgāmin[옴]'으로서 음역하면 사다함(斯陀含)이다. 예류과를 증득한 사람은 욕계의 수혹(修惑) 9품 가운데 앞의 6품을 끊게 되면 일래향(一來向)이라 일컫는데, 그제야 일래과를 향해 나아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일래과를 증득하면 천계와 인계를 한 차례만 왕복하면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환(不還)은 범어로 ‘an[否定]āgāmin[옴]'으로서 음역하면 아나함(阿那含)이다. 일래과를 증득한 사람은 욕계의 수혹 9품 가운데 나머지 3품을 끊게 되면 불환향(不還向)이라 일컫는데, 그제야 불환과를 향해 나아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불환과를 증득한 이가 금생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하면 사후에 천계에 태어나 그곳에서 열반을 성취하므로 금생 이후 더 이상 욕계에 돌아오는 일은 없다.

아라한(阿羅漢)은 범어 아르한(arhan)의 음역이다. 아르핫은 동사 ‘√arh(~할 가치가 있다)'에서 온 말로서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공양을 올릴 가치가 있는 수행자'를 가리킨다. 불교 이전부터 훌륭한 수행자를 지칭하는 용어였던 ‘아라한'은 부파불교에선 모든 번뇌를 멸한 자로서 성문승 최고의 계위에 해당한다.

사향사과 가운데 예류과만 증득하게 되면 해탈을 향하는 큰 흐름에 들어서는 까닭에 그만큼 예류과가 중요한 셈인데 예류과를 증득한 사람의 세 가지 특징이 ①유신견(有身見)을 극복하였고 ②회의적 의심을 극복하였으며 ③계금취견(戒禁取見)에서 자유롭다 하였으므로, 이 또한 무아론(無我論)을 기반으로 하는 아상(我相)의 극복이 핵심이라는 점은 ‘금강경’의 근본요지와 다르지 않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41호 / 2020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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