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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금강경 독송법을 생활화한 백성욱 박사의 발원

기자명 고명석

“업장탈겁‧재앙 소멸해 환희심으로 복 짓기를”

금강산서 수행공동체운동 전개…경기 소사 수행도량 개설
‘금강경 독송’ ‘부처님께 바치는 공부’ ‘원력’이 수행의 핵심
제자들 전국 곳곳서 회상 이뤄 염불‧봉사‧수행공동체 생활

불교교육과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백성욱 박사는 동국대 총장 시절 남산에 명진관을 신축하면서 동국대 서울 캠퍼스의 터전을 닦았다.
불교교육과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백성욱 박사는 동국대 총장 시절 남산에 명진관을 신축하면서 동국대 서울 캠퍼스의 터전을 닦았다.

‘금강경’ 독송을 간경수행법으로 체계화하여 생활 속 수행으로 마음의 해탈을 강조한 근현대의 선지식이 있다. 바로 백성욱 박사다. 그는 일찍이 명실상부한 수행공동체를 마련하여 마음의 수행과 몸의 수련을 동시에 꾀했다. 독일 철학박사 1호 또한 그였다. 자신의 욕망을 뛰어넘은 발원의 중요성도 그는 강조했다. 

“미륵존여래불(彌勒尊如來佛)을 마음으로 읽어서 귀로 듣도록 하면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이든지 부처님께 바치는 마음을 연습하십시오. 궁리를 가지면 병이 되고 참으면 폭발합니다. 이것이 닦는 사람의 항복기심(降伏其心)이라고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으시되 직접 부처님 앞에서 마음 닦는 법을, 강의 듣는 마음으로 믿어들으시고, 실행하여 습관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육체는 규칙적으로 일하시고, 정신은 절대로 가만 두십시오.”(‘백성욱 박사 법문’)

백성욱(白性郁, 1897~1981)은 백윤기의 장남으로 서울 연지동(창경궁 남동지역)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고모 밑에서 자랐다. 호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년 동안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1910년 14세 때 정릉 봉국사 최하옹(崔荷翁)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환속년도는 불분명하다. 백성욱은 출가 후 6년 동안 전국 각지의 사찰에서 경전 공부를 하였으며 1917년, 20세에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학림에 입학한다. 당시 중앙학림은 지방학림을 거쳐 우수한 승려들이 수학하던 최고의 근대 고등 불교교육기관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만해 한용운의 지도와 당부로 중앙학림의 학인들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다. 그해 4월 그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도반 신상완, 김대용, 김법린과 함께 밀항한다. 그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 8~9회나 왕래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백성욱은 1920년 1월15일 상해를 떠나 유럽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지혜는 곧 힘(곧 생명력)이라고 생각했던 바,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본보다 선진국인 서구에서 새로운 선진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조선의 살길이었다. 

그는 1921~1922년까지 2년간 친구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의 북부에 있는 보배고등학교(Beauvais)에서 독일어와 라틴어를 익힌다. 1922년 독일 남부에 있는 뷔르츠부르크(Wurburk)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4년에 졸업하고 ‘불교순전철학’(佛敎 純全哲學: Buddhistishe Metaphysik)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에 이른다. 우주의 진리에 대한 불교의 순수철학이라는 의미로 법에 대한 지혜의 통찰이다. 한국인 최초의 독일 철학박사학위였다. 학비 조달이 어려워 탄광에서 탄부생활을 하며 얻어낸 값진 결실이었다.

귀국 후 백성욱은 중앙불전 교수로 후학을 지도하고  월간지 ‘불교’사를 맡아 운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929년 돌연 교수직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그곳 안양암 및 지장암에서 근대 최초의 수행공동체 운동을 전개하며 회중수도(會衆修道) 생활을 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을 하고, 4시간 동안 ‘대방광불화엄경’을 부른다. 아침 공양 후 낮에는 각자 농사하기, 나무하기, 의복 짓기 등의 노동을 하고, 저녁예불 후 9시까지 ‘화엄경’을 부른다. 수행이 익은 이들은 1일 1종식이었으며 2~3시간 취침. 평등 공양, 탐진치 제거, 자기 성찰 위주였다.

지장암에서 수행대중이 500여명으로 늘어나자 일본 경찰이 압박해 왔다. 10년간의 금강산 수행을 마치고 하산하고 만다. 그는 1950년에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동국대 2대 총장을 지내면서 동국대 발전의 기반을 다진다.

1962년 백성욱은 경기도 소사의 야트막한 산을 개간하여 백성목장을 세우고 거기에 조촐한 ‘금강경’ 수행도량을 연다. 법당과 우사, 초막 등으로 구성된 목장으로 그와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이 새벽 3시에 일어나 ‘금강경’을 읽고 ‘미륵존여래불’을 부르며 정근한 뒤, 4시에 법문을 듣고 수행 문답 후 일과를 시작한다. 각자 스스로 일을 찾아 낮에는 목장 일을 하거나 농사를 짓고 나무도 했다. 2~3시경 점심 공양, 오후 불식이다. 저녁이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금강경’을 독송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백성욱은 수행 대중들과 함께 공양하고 같이 입고 같이 일했다.

백성욱이 말하는 수행의 핵심은 ‘금강경’ 독송과 부처님께 바치는 공부, 그리고 원력이다. ‘금강경’을 매일 7독이나 독송하는 이유는 ‘나’라는 아상을 녹이기 위해서다. 그렇게 아상을 녹이면서 바치는 공부를 한다. 이 시대의 부처님 미륵존여래불을 염하면서 올라오는 마음을 그대로 부처님께 바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은 마음인 삼독심을 지니고 있으면 병이 되고, 억지로 참으면 언젠가 폭발한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번뇌를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부처님께 바치면 마음이 해탈한다. 삼독을 마음을 밝히는 도구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바치며 불공 올리고 순간순간 원을 세우는 그 자리가 부처님 법당이다. 내가 하겠다고 하지 않고 부처님 전에 원(願)을 세운다. 그러면 ‘나’란 아상이 해탈되면서 부처님 시봉하는 큰 흐름을 타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의식적인 노력을 떠난 순수의지로서 공에 입각한 무원의 원이다. 백성욱 박사는 다음과 같이 사람들에게 축원을 올린다.

“제도하시는 영산교주 석가모니불 시봉 잘 하겠습니다. 용화교주 미륵존여래불 공경을~ 이 사람들이 모두 각각 지은 업보업장을 탈겁하여 모든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해서 부처님 전에 환희심 내어 밝은 날과 같이 복 많이 짓기를 발원.”

소사목장에서 수행공동체 생활을 했던 그의 제자들은 현재 전국 여러 곳에서 어엿한 회상을 이루어 ‘금강경’ 독송과 미륵존여래불 염불, 봉사 및 복지 활동, 재가 수행공동체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그 중에 하나, 고양시 원당에 자리 잡은 바른법연구원의 법당 건물 앞 팻말에는 다음의 글이 적혀 있다. 이 또한 발원문이다.

“죄업이 태산 같은 줄 알아야/ 진정으로 수도의 마음 생기나니/ 부처님 전에 정성껏 바쳐/ 일심으로 참회하옵고/ 새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 시봉 잘 하기를 발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 시봉하듯 부처님으로 모신다. 거지를 보고 측은한 마음으로 베풀지 않고 그를 부처님으로 모시고 바친다. 내 마음도 부처님 마음으로 밝아온다.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46호 / 2020년 7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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