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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지옥’ - 상

기자명 유응오

‘죄와 벌’ 탐구하는 알레고리 작품

당사자에 지옥 가는 때 고지
시간 되면 괴물 나타나 살해
고지는 업·원죄 등 해석 가능

연상호 글, 최규식 그림의 ‘지옥’은 알레고리(allegory) 작품이다. 미학자 발터 벤야민은 알레고리를 설명하면서 “각각의 별들이 이어져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밤하늘에 하나의 점으로 빛나는 별들이 선으로 이어져 별자리가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알레고리 작품은 지시 언어가 아닌 비유 언어에 기초하고 있고, 보는 이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지는 특성이 있다.

‘지옥’은 불특정 소수인 수취인에게 지옥에게 간다는 사실과 남은 시간을 알려주고, 그 고지된 시간에 수취인이 흉측한 괴물에 의해 살해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지옥’ 1부의 프롤로그는 고지를 받은 한 사내가 세 괴물에게 사지가 찢겨 죽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지옥’의 서사는 고지의 예고와 실행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까닭에 ‘지옥’에 대한 해석도 결국은 고지를 어떻게 해석할 지에 방점이 찍힐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수취인마다 주어진 삶의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어떤 수취인에게는 20년의 시간이, 어떤 수취인에게는 사흘의 시간이 남아 있음을 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지는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일화에서 뒤쫓아 오는 코끼리, 동아줄을 쪼는 흰 쥐와 검은 쥐, 우글거리는 독사로 해석될 수 있다. 고지의 의미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이거나 공포이거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그런가하면 새진리회라는 종교단체가 수취인을 세상에 뿌리 뽑아야 할 죄악의 근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고지는 종교학적으로는 원죄나 업보, 사회학적으로는 전염병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새진리회의 열성신도 모임인 화살촉에 의해 수취인은 물론이고 수취인의 가족까지 이중삼중으로 단죄된다는 점에서 고지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고 정죄하는 파시즘의 징후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처럼 알레고리는 열린 구성을 취하는 까닭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지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갓난애에게 고지가 이뤄지는 대목이다. 고지를 신의 의도로 해석하고 수취인의 죄를 사회적으로 알리는 게 인류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보는 새진리회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새진리회의 교리는 아담이 지은 원죄를 예수가 대속했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신의 율법을 범한 자를 엄벌한다는 것으로 변형한 것이다. 게다가 기독교 교리상 한 사람의 죄과는 계승될 수 없다. 새진리회가 갓난애에 대한 고지가 실행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사실이 알려질 경우 신의 죄를 지은 자에게만 고지가 실행된다는 새진리회의 교리가 엉터리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지옥’을 본 불자들은 이런 질문을 갖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죄를 씻을 수 있을 것인가? 해답은 초조 달마대사와 이조 혜가 스님이 나눈 선문답이나, 혜가 스님과 삼조 승찬 스님이 나눈 선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달마대사가 숭산 소림사의 바위굴에서 정진을 하고 있을 때 신광이란 사내가 도를 구하려고 찾아왔다. 신광은 자신의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에게 바친 뒤 물었다. “저의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 주십시오.” “마음을 내놓아라, 그럼 안심시켜 주마.” “찾아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달마대사는 신광을 제자로 삼고 혜가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훗날 혜가 스님에게 나병환자가 찾아와 문안 인사를 했다. “전생의 죄가 많아 찾아왔으니 죄를 소멸하여 주옵소서.” “죄를 내놓아라. 소멸해주겠다.” “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기실, 죄의식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우선 불교의 계율을 지키고 자비로운 언행으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하며, 다음으로는 마음이 부처임을 깨달아 ‘죄라는 것은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고 중간에도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리라.

유응오 소설가 arche442@hanmail.net

 

[1549호 / 2020년 8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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