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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성철 스님의 발원

기자명 고명석

승가공동체의 복원과 중도 정신 실현 기원

증도가 읽고 스스로 화두 들어 공부…26세에 해인사로 출가
‘승가 청정성’ ‘부처님 법대로’ 복원 위한 자발적 결사 주도
해인총림 초대방장 취임 매일 2시간 백일법문서 ‘중도’ 강조

성철 스님은 승가공동체의 회복과 중도정신의 실천을 발원하고 항상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불교의 수행풍토를 복구하기 위해 봉암사 결사를 추진하여 승가의 수행공동체 정신을 올곧게 실현하려고 애썼을 뿐더러, 절연이속(絶緣離俗)이라는 그 출가적 삶의 지향점을 발원하고 몸소 실천해 나갔던 사람이 성철(性徹) 스님이다. 그는 또한 미추와 신분, 선악과 빈부를 떠나 모든 사람들 누구에게나, 기고 나는 모든 생명들 그 어떤 존재에서나 간직되어 있는 불성, 본래 부처로서의 성품을 강조하고, 이 불성에 눈을 띄우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화두 참선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그것은 자기를 바로 보기 위한 몸짓이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의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성철(1912~ 1993)은 일제강점기에 경남 산청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다. 그는 어릴 적에 한학을 두루 익혔으며 영민했다. 삶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품어가면서 홀로 동서고금의 철학, 종교, 사상서를 독파해 나갔다. 20세를 전후하여 불교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증도가’를 읽고 마음이 크게 움직인다. 24세 때는 산청 대원사에 40여일  동안 화두를 들고 공부할 정도로 공부가 익자 최범술 스님의 권유로 해인사로 들어가 26세 때 동산 스님 문하로 출가한다. 그는 1940년(29세)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한다. 1947년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 20명의 도반들과 더불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하면서 결사에 들어간다.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願)이었습니다.”
이 봉암사 결사는 승가공동체의 청정성을 부처님 법대로 복원하기 위한 자발적인 결사운동이었다. 일상에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한다는 기치 아래 물 긷고 나무하며 씨 뿌리고 작무에 임했다. 신도들로부터 공양이 들어오면 전체 대중의 몫으로 하고 개인적으로 받지 못하도록 했다. 대중들은 면벽 좌선하고 일체 잡담은 금했다. 신도들이 불공을 직접 올리도록 했으며 대신 해 주지 않았다. 재가 들어오면 경전만 간략하게 독송해 줄 뿐이었다. 

성철은 1955년 들어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밖으로 한번 나가지 않고 8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한다. 1964년에는 도봉산 도선사에서 청담 스님과 함께 실달학원(悉達學園)을 세우고 서원을 발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도제 양성 교육기관이었다. 그 서원문의 주요 내용을 보자.

① 항상 산간벽지의 가람과 난야에 머물고, 도시나 촌락의 사원과 속가에는 머물지 않겠습니다. ② 항상 옛 부처님과 옛 조사님들이 남기신 가르침과 청규를 모범적으로 힘써 행할 것이며, 일체의 공직과 일체의 집회와 회의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③ 항상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남기신 가르침의 앙양에 모든 힘을 다하며, 그 밖의 다른 어떠한 일에도 발언하거나 간여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철저한 세속과의 단절, 그리고 승가의 순수성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이도 봉암사 결사에 이은 승가 공동체의 정통성과 청정성 회복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승가에 대한 자각은 수도자의 길을 가는 그의 발원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발원하옵나니, 철석같이 단단한 마음으로 세세생생 무루선 닦아 크고 큰 지혜와 덕, 커다란 용맹심으로 만겹 장애 만겹 미혹 모두 녹아지이다. 여자의 몸은 그림자도 닿지 않으며 중생의 고기는 그 어디에 입을 대리오. 깨끗한 시주물이라도 화살인 듯 피하고 부귀와 영화는 원수 보듯 하여서 굳게 닫힌 쇠관문을 단번에 뚫고 비로정상에 훌쩍 뛰어올라서 보리의 대도량 청정하게 장엄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언제나 자재하여지이다.”

성철은 1967년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다. 그는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사부대중을 위하여 하루 두 시간씩 백일 동안 법문을 하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백일법문’이다. 성철은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중도를 강조한다. 중도는 유와 무, 생과 사, 옳음과 그름, 나와 너 등 이분 대립적 양극단의 모순 대립이 완전히 사라지고 유가 무이며, 생과 사 등이 혼연히 어우러져 대립의 일치를 보이는 절대 융합의 경지라 했다. 여기에서는 “악한과 성인이 일체이며, 너는 틀리고 나는 옳다 함이 한 이치이니, 호호탕탕한 자유세계에서 어디로 가나 웃음뿐이요, 불평불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럴 때 사바가 극락이며 영원한 자유에 머문다. 여기서 지젝이 헤겔을 다시 읽으며 보여준 대립항들의 일치 지점-‘정신은 뼈이다’, 그리고 라깡의 강조점, ‘철저한 자기 부정, 주체의 폐기’를 참조해 보자. 주체의 폐기는 차이의 수용과 모순 대립이 사라지는 틈이 아닌가?   

성철은 ‘열반경’의 말씀을 빌어 중도가 불성이라 하고, 이 불성을 바로 보는 것이 바로 견성이라고 했다. 그 견성은 돈오(頓悟)다. 돈오돈수다. 돈후 이후에는 닦을 것도 없다. 일초직입여래지다. 단박에 미세 망념을 모두 끊어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극중죄를 지은 사람도 견성할 수 있다. 철저하게 주체(자아)를 폐기하는 화두 참선을 통해서. 그렇다면 성철은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더불어 이를 화두 참선으로 실증하자고 역설하고 있는 것일 게다.  

성철이 강조한 또 하나는 남을 위해 기도하라는 점이다. 그는 남모르게 남을 돕는 것이 참다운 불공이라 했다. 절을 하는 것도 ‘나’라는 아상을 잠재우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조석으로 예불할 때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세 번 축원하라고 강조했다. 참선도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성철에게는 그것이 견성 이후의 보살행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승가공동체성의 회복이 절실했다. 그것이 성철의 진정한 발원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불교 공동체성이란 무엇일까?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50호 / 2020년 8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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