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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여시아문과 중생상

기자명 현진 스님

여시아문, 인도어 특징 담긴 대표적 수동문

중생은 결함 지닌 상태이기에
인도인들은 깨닫기 전까지는
능동문을 쓸 수 없다고 여겨

경전의 첫머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 현대의 대역경가이셨던 운허 스님에 의해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능동문으로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범어로는 “evaṁ(그렇게) mayā(나에 의해) śrutam(들렸다)”으로써 인도어의 특징인 수동문의 대표격 표현이라는 것은 본 연재물의 첫머리에서도 언급되었다.

일반적으로 인도 말이 수동문을 기초로 하다시피 하는 연원을 인도의 관련 철학에서 찾아보면, 절대상태이자 존재인 브라흐만(Brahman)이 어떤 연유로 인해 불완전한 상태로 바뀌자 전변(轉變)의 형태로 모든 천지창조가 진행되었다는 설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화란 그 민족의 언어가 온전히 정착된 후에 일궈지기 마련이지만, 신화와 역사의 개념이 혼재하고 근본적인 사고의 출발점이 우리와 제법 다른 인도이기에 우리에겐 아주 이상한 일이 인도에선 그저 평범한 일일 수 있겠기에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능동표현에 익숙한 우리가 수동표현이 평범한 인도의 말버릇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쓴 글 가운데 많은 부분을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원전(原典)을 배우려는 것이겠지만….

제15 지경공덕분 후반부에 “하찮은 법을 좋아하는 자는 사상(四相)에 집착하는 까닭에 이 ‘금강경’을 듣거나[聽] 받아지니거나[受] 독송하거나[讀誦] 남을 위해 해설해줄[爲人解說] 수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읽는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문을 약간 축약하여 옮긴 것이다. 동일부분의 현장 스님 번역문을 뒷부분만 옮겨보면 “하열한 믿음과 이해를 지닌 유정은 이 가르침을 받아지니고[受持] 독송하여[讀誦] 궁극적인 것까지 통달하며[究竟通理] 더불어 남을 위해[爲他] 널리 설해주어[宣說] 열어 보이고[開示] 이치대로 뜻을 지을 수는[如理作意] 없다”로 범문과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다만 ‘받아지니고’ 등의 표현이 굳이 수동문으로 읽어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능동문으로 되어있는 점이 차이가 날 뿐이다.

그렇다면 범어원문은 과연 위에서 밝힌대로 완전한 수동문인가? 범문을 필요한 부분만 직역해보면 “이 법문은 보살이 되겠다는 서원을 지니지 않은 중생들에 의해 들려진다거나[聽] 가져진다거나[受持] 독송되어진다거나[讀誦] 깊이 이해되어진다[究竟通理]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되어있으니, 의미상 주어는 ‘중생(sattva)’이지만 문법상 주어는 ‘법문(dharmaparyāya)’인 완전한 수동문이다.

그렇다면 ‘들린다’와 ‘들려진다’에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인도인들은 수동문을 고집 혹은 선호하는가? 비록 이미 한 두 차례 언급된 내용이 되겠지만, 그들에겐 완벽한 가르침은 절대존재인 브라흐만(불교의 경우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절대존재거나 아니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이를 제외한 모든 이는 아직 결함을 지닌 상태인데, 그렇게 결함을 지닌 이가 완벽한 가르침을 능동적으로 ‘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여긴다. 그래서 그저 그 가르침을 자신의 귀에 ‘들려진’ 그대로 토씨 하나 변경시키지 않고 기억하고 그에 준하여 닦아가서 결국엔 ‘들려진’이 아닌 ‘들었다!’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도에서의 요가(yoga)요 수행(修行)이다.

비유하자면, 멀쩡한 정신 상태로 사회생활을 잘 해나가던 사람[覺者]이 어느 날 약주 한 잔 걸치니 약간 취하게[제법 깨어있는 者]가 되고, 약주가 술을 부르고 술이 과음을 불러 고주망태[衆生]가 되면 만사가 횡설수설인 것은 당연하리라. 그런 술꾼이 정신을 차려 술을 끊고 몸에 남은 알콜을 모두 제거하면[修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각자’와 ‘중생’이 둘이 아닌 하나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남 자체는 곧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과 같기에 살아가는 모든 이는 술기운을 지녔다는 원죄론이 성립된다. 원죄론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술기운을 벗고 결국엔 그 태어남 자체도 되돌릴 수 있으면 그것이 원죄에서 벗어남[解脫]이니, 그 전까지 그러지 못하고 존재하는[sat] 상태[­tva]를 중생(sattva)이라 일컫는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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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아인중생수자 ← 아중생인수자

중생이란 범어는 살아있는(sat)+상태(­tva)

중생상 : 태어나거나 살아있는 상태는 곧 중생이란 사실은 고정불변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중생상이다. - 우리가 해탈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중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1552호 / 2020년 9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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