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인연 ➄
17. 인연 ➄
  • 박희택
  • 승인 2020.09.08 13:48
  • 호수 1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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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현상·존재는 연기 바탕으로 회통

연기는 창안한 것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 현상
모든존재 상의상관성 맺고
비인과적 연기도 마찬가지

인연이 주관적·객관적 조건을 갖추는 실천론적 개념이라면, 인과는 삼세양중인과론에서 보듯 시간과 더불어 전개되는 그 과정을 지각하는 인식론적 개념이다. 이에 비해 연기는 비실체적이긴 하지만 있음의 현상과 그 의미를 나타내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12연기설만 해도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라는 12가지 존재현상을 표현한 것이다.

연기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현상이며, 붓다는 이를 최초로 깨달아 연기라 표현한 것이다. 붓다는 “연기의 도리는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나 이외의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縁起法者 非我所作 亦非餘人作). 더구나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않거나 연기의 도리는 상주불변하여 법계에 머물러 있다(然彼如來出世及未出世 法界常住). 여래는 몸소 연기의 도리를 깨달아 최상의 깨달음에 이르고, 중생을 위해 그것을 해설하여 널리 밝힌다(잡아함경12)”고 표현하였다.

월폴라 라훌라가 명저 ‘붓다의 가르침(What the Buddha taught, 1959)’에서 갈파하였듯이, 붓다의 깨달음은 ‘있는 그대로를 보다(sees it as it is)’의 의미를 기본적으로 띤다. 연기를 깨달은 것이라 함은 이를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현상 곧 연기에 눈뜬 이가 붓다인 것이다. 붓다의 “만약 연기를 보는 이는 곧 법을 보고, 만약 법을 보는 이는 곧 연기를 본다(若見縁起便見法, 若見法便見縁起)”는 ‘중아함경’ 제7권 말씀은 이를 나타낸 것이다.

오나라 지겸(支謙)이 한역한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 들머리에도 “연기를 보면 법을 보는 것이며, 법을 보면 나(여래)를 보는 것이다(見縁起爲見法, 已見法爲見我)”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직관해야 할 것은 법은 연기의 진리인 동시에, 연기의 현상이며, 연기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법이 가진 세 가지 의미 곧 ‘진리’와 ‘현상’과 ‘존재’가 연기를 바탕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회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연기는 붓다교설의 중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기를 크게 인과적 연기와 비인과적 연기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12연기설과 같이 과거의 2인(무명-행)이 현재의 5과(식-명색-육처-촉-수)로 귀납되고, 현재의 3인(애-취-유)이 미래의 2과(생-노사)로 귀납되는 것이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인과적 연기이다. 이 유전문을 역으로 환멸문을 통해 연역하여 가더라도 인과적 연기는 성립한다. 이를 붓다는 ‘잡아함경’ 제14권에서 증가하는 법[增法]과 소멸하는 법[減法]을 설하면서 이렇게 명료하게 표현하였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此滅故彼滅).”

전자 두 구절은 증법에 해당하고, 후자 두 구절은 감법에 해당한다. 증법은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고, 행이 있으므로 식이 있으며, … 순으로 연기를 파악하는 법이다. 감법은 무명이 소멸하므로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므로 식이 소멸하며, … 순으로 연기를 파악하는 법이다. 감법을 환멸문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

연기는 세상[法界]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맺고 있다는 것인데, 비연기적 연기 또한 이 점에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연기를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국한시키는 것(인과적 연기)을 넘어서 관계일반으로 확장하면서 필연적 상의상관성을 확인한 것이 비인과적 연기이다. 드러난 것만 보면 우연적으로 전개된 것처럼 보여 직접적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듯하나,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연기현상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오리건주에 있는 리드칼리지를 중퇴하고, 그 대학 서체학 강좌를 청강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매킨토시 컴퓨터 서체로 연결된 것과 같은 것이다. 세 현상의 인과관계는 직접적이지 않으나, 그 상의상관성은 확고한 비인과적 연기현상임에 틀림없다.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축사에서 “제가 대학을 중퇴하지 않았더라면, 서체학 강좌를 듣지 못했을 테고, 퍼스널 컴퓨터는 현재와 같은 아름다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고 고백하였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552호 / 2020년 9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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