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일본 사리신앙의 발전과 전개
17. 일본 사리신앙의 발전과 전개
  • 신대현
  • 승인 2020.09.15 10:47
  • 호수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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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강화 위해 불교 받아들이며 사리신앙 확대

불사리 영험 경험한 쇼토쿠 태자 ‘유마경’ 풀이 등 대중화 힘쏟아
6세기 이후 왕경 중심으로 사찰 창건…탑마다 불사리 봉안 시작
헤이안 시대, 중국에서 불사리 들여오며 사리신앙 전성기 맞아
금구 사리기. 간진(鑑眞) 스님이 당에서 모셔온 불사리 80과를 담은 사리기로, 도쇼다이지(唐招提寺)에 전한다. 거북 형태를 한 것은 간진이 귀국할 때 거북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한일 양국의 불교사를 비교해서 살펴보면, 아스카·나라 시대(6~8세기)는 불교가 처음 전래하고 발전한 시기로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한다. 또 헤이안 시대(8~12세기)는 불교가 일본 특유의 정서를 담아내며 융성했던 시기로 우리의 통일신라 및 고려 중기와 겹친다. 이 두 시기에 사리신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면 일본 사리신앙의 큰 흐름을 이해하기가 쉽다.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열성을 보였던 이는 아스카시대 융성의 장본인으로 일컬어지는 쇼토쿠(聖德, 574?~622)태자였다. 고구려의 혜자(惠慈), 백제의 혜총(惠聰) 스님에게 불교를 배운 그는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다. 쇼토쿠태자는 ‘법화경’이나 ‘유마경’의 의소(義疏), 곧 경전이나 논서의 낱말과 문장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한 글이나 책을 펴내어 대중화에도 힘을 쏟았다. 

그가 불교를 돈독하게 믿었던 배경에는 스무 살 때인 594년에 불사리의 영험을 경험한 일이 큰 작용을 한 것 같다. 어느 봄날에 그가 동쪽을 향해 ‘나무(南無)불’을 염송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바닥에 하얀 불사리 한 알이 나타났다. 감격한 그는 불교를 더욱 신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불사리는 이후 ‘나무불사리’로 불리며 왕궁 깊숙한 곳에 보관되었다(‘太子傳古本目錄抄’). 정사(正史)에 나오는 얘기는 아니더라도,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사리 영험의 경험이 사리신앙의 원동력이 되었던 역사적 패턴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6세기 이후로는 왕경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 곳곳에 사찰이 창건되고 탑마다 불사리가 봉안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주로 왕족, 귀족에게만 허용되었던 불사리 참배의 기회를 대중들도 갖게 됨으로써 사리신앙이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밀교 법구인 오고저(五鈷杵). 구카이(空海)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밀교 법구로, 손잡이 중간 둥근 청색 유리를 끼운 자리의 구멍에 불사리를 넣었다. 일본 국보로, 도지(東寺)에 전한다.

특히 754년에 간진(鑑眞, 688~763) 스님이 중국에서 불사리 3000과를 넘게 모셔와 도쇼다이지(唐招提寺)에 봉안한 일은 일본의 사리신앙 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 중에는 골(骨)사리 외에 육(肉)사리와 발(髮)사리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국왕, 대신, 승려들에게 일부를 나누어 주고도 3000과나 되었다고 하니, 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불사리를 어떻게 가져올 수 있었는지 쉽게 상상이 안 된다. 이 일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큰 화제였고, 신도도 크게 늘었다(‘唐招提寺建立緣起’). 또 이전 백제와 신라에서 보내온 불사리는 작은 사리기에 담아 탑의 중앙 기둥 한가운데에 안치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금제 및 유리제 등 각종 사리용기를 화려하게 만들어 넣는 등 사리의 봉안 형식이 새롭게 시작되었던 점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지금 도쇼다이지에 전해오는 거북 형태 사리기가 이때 모셔온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그런데 사리기가 거북 형태를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간진 스님이 중국에서 어렵게 불사리를 얻어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을 때였다. 한참 바다를 헤쳐나가는데 풍랑이 거세게 일어 난파되어 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물속에서 황금색 커다란 거북 한 마리가 솟아올라 간진 화상과 사리 상자를 등에 지고 일본까지 무사히 건네주었다는 것이다(‘鑑眞過海大師東征傳’). 비록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불사리가 일본에 전해지기까지 갖은 난관을 겪어야 했고 극적으로 전해졌던 상황이 녹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가 모셔온 3000과는 그 뒤 여러 사찰에 봉청(奉請), 곧 분안(分安)됨으로써 뒤이은 헤이안시대에 일본 사리신앙의 융성을 이끌었다. 

일본 천태종을 연 사이초(最澄, 766~822) 스님의 사리 영험 이야기도 인구에 회자한다. 사이초 스님이 처음 야마구치(山口)의 히요시(日吉)신사의 선원에 머물던 어느 날, 향로에 남은 재 중에서 문득 불사리 하나를 얻었다. 감격한 그는 불사리를 안치하는데 알맞은 자리를 찾다가 788년에 교토 부근에서 히에이잔지(比叡山寺)를 창건했다. 이 무렵의 사리기 중에는 불꽃 형태의 보주(寶珠)를 강렬하게 배치한 둥근 사리기가 있는데 바로 사이초 스님이 불사리를 얻은 향로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에서 밀교를 배우고 돌아와 진언종을 창시한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 774~835) 스님도 불사리 80과를 모셔와 교토의 도지(東寺)에 봉안했다. 이 불사리는 천황이 하사했다는 두 개의 사리호에 담겨 있는데, 예로부터 세상에 상서로운 일이 생기기 직전에 개수가 스스로 늘어났다가, 반대로 흉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줄어드는 이적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일본 내에서도 가장 영험 있는 사리로 유명했다. 그런 까닭에 대대로 이 절의 장자(長者) 스님이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사리호에 든 사리의 수를 세는 일[勘計]이었다고 한다(‘東寺 長者 法務 弘眞文觀 佛舍利勘計記’). 

또 구카이 스님은 중국에서 귀국할 때 오보오고(五寶五鈷)금강저, 오보오고령, 오보삼매야저(三昧耶杵), 오보독고(獨鈷)금강, 오보갈마(羯磨)금강, 오보륜(五寶輪) 등 6개의 밀교 법구에다가도 각각 불사리를 넣어서 가져왔다(‘僧空海將來目錄’). 그가 밀교와 사리신앙을 연결하여 불사리를 통해 삿된 것을 물리친다는 개념을 정립한 이후 밀교 법구 안에 사리를 봉안하는 일은 관례화하여 최근까지 이어진다. 이렇듯 일본의 밀교사상은 사리신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838년부터 847년까지 중국 당나라에 머물렀던 여정과 당나라 내 신라인의 생활을 자세히 묘사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엔인(圓仁, 794~867) 스님도 불사리를 모셔왔다. 그는 사이초 스님이 세운 히에이잔지의 후신인 엔랴쿠지(延曆寺)의 스님으로, 귀국길에 불사리 2과와 보살사리 3과를 백자에 넣어 모셔왔다고 한다(‘僧圓仁求法目錄’). 

헤이안시대 일본은 이렇게 중국으로부터 다량의 불사리를 들여옴으로써 사리신앙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그와 관련된 사리 봉안의 기록이 다양하고, 오래된 사리장엄과 불사리도 많이 전한다.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와 불사리를 전해주었으나, 정작 갖은 전란 등으로 인해 실물과 기록이 전하는 예가 아주 드문 우리로서는 부럽기만 한 일이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53호 / 2020년 9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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