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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제36칙 운문명교

운문과 명교의 선문선답

스승 의도 파악한 명교 답변에
압박질문 가해 쐐기박은 운문
언구따라 가르침 헤아리는 건
선기와는 아득히 멀어지는 길

운문이 어느 날 명교에게 물었다. “오늘은 호떡을 몇 개나 맛보았는가.” 명교가 말했다. “다섯 개 먹었습니다.” 운문이 물었다. “그럼 노주는 몇 개나 먹었는가.” 명교가 말했다. “화상께서는 다당(茶堂)에 들어가 차를 드십시오.”

선지식이 납자를 일깨워주는 방식은 다종다양하다. 어떤 경우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가능하고, 어떤 경우는 수많은 말을 해주고도 본전도 찾지 못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침묵과 언설을 섞어서 내보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몸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문답 자체를 부정해버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질문으로 답변하고 답변으로 질문하기도 한다. 각기 그 상황에 따라서 정해진 규칙은 없다. 그래서 운문은 평소에 납자를 교화하는 경우에 무척이나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다. 어느 때도 납자를 교화하는 수단에 대하여 여러모로 궁리하다가 말했다.

만약에 그 어느 누가 번뇌가 사라진 경지가 되었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벌써 질문자와 답변자가 서로 상대를 매몰시켜버리는 꼴이다. 더욱이 한걸음 나아가서 납자가 언구를 따라서 스승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더욱이 천차만별로 따지고 재며 묻고 헤아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한바탕 말재주로만 남아 있을 뿐이지 깨침으로부터는 아득히 멀어지고 만다. 만약 운문의 문하에서는 설령 언구 속에서 선기를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고, 설령 일구를 듣고 바로 알아차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깨침에 대해서는 깊이 잠들어 있는 꼴처럼 아직도 멀고먼 남의 일과 같을 뿐이다. 이에 한 승이 물었다. ‘그 일구란 무엇입니까.’ 운문이 말했다. ‘거(擧)’

여기에서 운문이 일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단지 거(擧)라고 말한 것은 분명하고 단호하다. 곧 어떤 것을 질문하든지간에 그 말은 마음속에서 그려두고 있는 이미지에 불과할 뿐으로 벌써 깨침으로부터 십만팔천 리나 멀어져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바로 선문답에서 분별사유를 용납하지 않거늘 어찌 식정에 떨어져서야 되겠느냐는 뜻이다. 또한 언설로는 깨침의 경지를 궁구할 수도 없고 묘용을 활용할 수도 없으므로 무릇 일상의 생활하는 가운데서 항상 근본도 없고 의거할 것도 없는 망상에 바쁘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운문은 바로 이런 점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홀연히 명교에게 ‘오늘은 호떡을 몇 개나 맛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이것은 낚싯바늘에 걸려든 것이 물고기인지 용인지 변별해볼 요량으로 내세운 질문이었다. 그러자 명교는 ‘다섯 개 먹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이것은 명교가 스승의 의도를 미리 알아채고 반대로 그것을 이용하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아직 운문에게는 명교의 그와 같은 깜냥으로는 다섯 개나 되는 떡을 끝내 씹어볼 수도 없는 모습이라고 판단하고 다시 물었다. 곧 ‘그럼 노주는 몇 개나 먹었는가’라는 말은 다섯 개를 먹었다는 말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명교를 향해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질문이다.

운문이 지나치게 순진한 승의 답변에 대하여 좀 더 분발하라고 쐐기를 박아주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명교로 하여금 눈꼽만치라도 분별심으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미리 철저하게 가림막을 쳐서 분별하려는 제스쳐도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과연 그와 같은 상황에서 명교는 출신활로(出身活路)의 방법을 찾아가는 답변으로서 운문에게 뭐라고 표현했을까. 명교는 그저 ‘화상께서는 다당에 들어가 차를 드십시오’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 찰나에 운문은 더 이상 압박을 가할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명교는 더 이상 운문의 수단에 휘말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말씀드렸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문답은 일단락되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로서 선문선답(善問善答)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노주(露柱): 노출되어 있는 기둥이라는 말인데, 법당이나 불전의 둥근 기둥처럼 무정물 또는 비정물의 의미이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56호 / 2020년 10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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