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제37칙 운거육호(雲居六戶)
38. 제37칙 운거육호(雲居六戶)
  • 김호귀 교수
  • 승인 2020.10.19 17:46
  • 호수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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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개 문을 밝게 열지 못했을땐?

안·이·비·설·신·의 열지 못하니
어떤 반열에도 능동대처 불가
깨침 터득한 후엔 일상 평상심
여섯개 문 애써 단속 필요없어

한 승이 운거도응에게 물었다. “여섯 개의 문[六戶]을 밝게 열지 못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거가 말했다. “어떤 반연도 감당할 수가 없다.” 승이 물었다. “그러면 향상사(向上事)의 경우는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운거가 말했다. “신중한 사람은 굳이 여섯 개의 문을 단속할 필요가 없다.”

도를 깨친 사람의 분상으로 말하면 일체의 살림살이에서 자비를 발견하고 만물의 변화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응대하며 굳이 어느 것에도 국집하지 않고 평등하게 반응해준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명예야말로 밧줄로 묶어두기가 어렵고 명리는 인위적으로 다스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참선에 마음을 둔 납자라면 당연히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곧 모든 일에 집착을 버리고 분별을 초월한 도인의 면모를 그려낼 줄 아는 삶을 지향하고 누리는 모습을 말한다. 여기에서 승이 말한 육호(六戶)는 육문(六門)이나 육국(六國)이나 육출(六出)이나 모두 육근(六根)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약산유엄(745~828)이 어느 날 제자 운암담성(782~841)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그대는 사자를 잘 데리고 논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운암이 대답하였다. “예, 사실입니다.” “그러면 사자를 데리고 노는 재주가 몇 가지나 되는가.” “여섯 가지의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그대처럼 사자를 데리고 놀 줄은 안다만, 재주는 다르지.” “화상께서는 몇 가지 재주가 있는 겁니까.” “나는 딱 한 가지뿐이다.” “그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재미있게 노는 것이지.”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화상의 그 한 가지는 곧 저의 경우에 여섯 가지이고 저의 경우에 여섯 가지는 곧 화상의 한 가지와 같습니다.” “그렇지, 사자를 잘 데리고 노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데리고 노느냐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약산과 운암의 사자에 대한 문답은 반야지혜를 활용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여섯 가지 바라밀로 실천하는 것과 한 가지 대자비심으로 드러내는 것이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운암은 대번에 약산의 말에 수긍을 하고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 그 한 가지와 여섯 가지가 다름이 없음을 말씀드렸다. 이에 약산은 운암을 인정하였다. 운암은 약산이 묻는 의중을 간파했다는 것을 보여준 문답이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가 의기투합(意氣投合)하는 모습이란 바로 이와 같다. 하루 종일 일상의 행위에서 이러한 도리를 생각하고 그러한 도리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 구체적인 행위란 말하자면 잊지 말고 보고 들으며 냄새 맡고 설하고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접촉하면서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들어야지 입으로만 나불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여섯 개의 문을 충분히 알고 활용하며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전승해주는 방편도 실천하는 때를 말한다.

이에 운거는 그러한 상황이라면 어떤 반연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는 까닭에 눈으로는 색에 얽매이고 귀로는 소리에 집착하며 코로는 냄새에 얽매이고 혀로는 맛에 집착하며 몸으로는 촉감에 얽매이고 생각으로는 분별에 집착한다.

그래서 승이 다시 ‘그와 같은 경우라면 향상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응대하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향상사에 대해서는 깨침을 터득한 연후에 깨침마저 초월하여 일상의 생활에서도 무사한(無事閑)의 면모를 누리면서 평상심(平常心)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여섯 개의 문을 애써 단속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조바심으로 애써 어떤 행위를 성취하려는 집착은 오히려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까닭에 자연법이(自然法爾)하게 해탈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일러주고 있다. 그런 경우라면 아무런 말을 내뱉어도 그리고 호흡을 내쉬어도 모두 경전의 가르침에 계합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한 가지 일에 모든 반연을 내려 놓는 휴헐(休歇)이 성취되면 육근의 작용이 모두 해탈한다고 말한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57호 / 2020년 10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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