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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노 요코의 ‘그래도 괜찮아’

기자명 박사
  • 박사의 서재
  • 입력 2020.11.03 13:18
  • 수정 2020.11.03 13:19
  • 호수 1559
  • 댓글 0

우리의 내밀한 속을 열면 어떻게 될까

나 믿어주는 이에 속내 보임은
그 안에 친절함이 있기에 가능
좋은 인연도 나쁜 인연도 흘러가
편견 없이 볼 때 부처 보이는 법

‘그래도 괜찮아’

가끔, 내가 없는 당신을 생각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까. 하지만 이 세상엔 실체가 없고 오로지 관계뿐이니, 내가 본 당신의 표정을 다른 이들이 똑같이 볼 리는 없겠지. 한때는 서로가 좋아 죽고 못살았지만 지금은 그저 고통일 뿐인 사람을 찬찬히 생각해보면 알게 된다. 그가 변한 것도 내가 변한 것도 아니라, 그저 관계가 달라졌을 뿐임을. 

사노 요코는 이 책에서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토록 재미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니 이 사람의 인생은 무엇이 특별한 걸까 싶었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나 뿐은 아니었나보다. 에세이스트 사카이 준코는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린다. “아마도 그들은 사노 씨와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못 견디게 되었던 게 아닐까요. 특별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거기서 재미나 유머가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사노 씨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믿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을 근본적으로 믿어주는 사람에게 우리는 스스럼없이 속내를 보여준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친절함이다. 대형서점 매니저는 처음 보는 젊은 사노 요코가 비싼 책을 할부로 팔아달라고 부탁하자 “할부 판매는 안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대신 값을 치러두죠”라며 거금을 먼저 지불하고 매달 푼돈을 돌려받는다. 택시운전사들은 그저 손님인 그에게 일본의 현악기인 ‘다이쇼고토’를 연주해주거나, 단풍놀이를 가자며 꼬드기거나, 결혼하고 싶은 애인이 알고 보니 나이를 열여덟 살이나 속였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억대의 돈을 사기친 부동산업자는 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꿈을 말해주고, 지하철에서 만난 남자는 12년 전 사람을 죽인 경험을 말하며 “누님, 사람을 죽이면 안 돼”라고 조언한다. 

모든 사람이 그와 관계가 좋았을 리는 없다. 좋은 인연도 나쁜 인연도 흘러간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 맺고 서로에게 어떻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지 지켜본다. [스즈키 의원]의 스즈키 선생님과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특히 인상적이다.  스즈키 선생님은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다는 평을 듣는 존재감 없는 의사다. 사노의 아버지는 원인을 모르는 채 큰 병원을 찾아다니다 결국 손쓸 방도 없이 집에 칩거한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동네병원인 스즈키 의원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오는 것뿐이다. 의사도 비타민제를 처방하는 정도의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스즈키 선생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다. 아버지의 병이 악화된 이후에는 왕진을 와 시뻘건 얼굴을 갸웃거리며 청진기를 갖다 대곤 한다. 아버지도 그에게만은 정중한 믿음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진 날, 스즈키 선생님은 왕진가방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와 아버지의 곁을 지킨다. 아버지의 팔을 내내 쥐고 있던 선생님은 “세시 십삼분입니다”라고 말한 뒤 왼손으로 안경을 벗고 왼팔을 눈에 갖다 대고 운다. 사노 요코는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말한다. “아버지가 죽고 이십오 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의사를 얻고 죽었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려는 사람의 눈에는 무엇이 보일까. 아마도 부처가 보이겠지. 누군가에게는 사기꾼이거나 잡범이거나 불륜남녀인 이들이 본래부처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당신과 나의 관계가 달랐다면 나도 당신이 부처라는 것을 알아보았겠지. 당신도 알아보았겠지. 

사노 요코는 죽음을 목전에 둔 친구에게 말한다. “있어줬으면 한다.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살아올 수 있었다. 가장 곤란할 때 나를 구해준 것은 저축이 아니었다. “괜찮아”라는, 그 집 마루에서 당신이 해준 말이었다.” 그 친구도 사노 요코도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책을 덮으며 “괜찮아”라고 중얼거려본다. 그 말 속에 부처가 있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59호 / 2020년 11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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