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장 그르니에의 ‘섬’
20. 장 그르니에의 ‘섬’
  • 박사
  • 승인 2020.11.17 11:05
  • 호수 15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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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자리에 앉은 충만에 매혹되다

카뮈의 헌사로 더욱 유명한 책
공허로 자유 아닌 무감각 얻고
상처와 욕망 휩쓸고 지나간 후
진정한 공 알고 그 매혹에 빠져
‘섬’

장 그르니에의 ‘섬’이 다시 출간되었다. 글 자체보다 제자인 알베르 카뮈의 헌사인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는 문장으로 더 유명한 책.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책이 번역자인 김화영이 다시 살펴 고친 새 번역으로 나왔다. 

역자는 ‘새 번역을 내놓으며’라는 짧은 글을 덧붙여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힌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 책을 발견하고 당장 매혹된 역자는 번역한 원고를 들고 여러 출판사를 찾았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후 월간 ‘문학사상’에 프랑스의 아름다운 산문시리즈를 소개할 지면을 얻어 당시에는 국내에 생소했던 장 그르니에의 에세이 한 편을 싣는다. 이 글을 본 민음사 대표는 출간을 결정한다. 그 글이 이 책의 첫 번째 에세이인 ‘공의 매혹’이다. 

그 글에서 장 그르니에는 말한다. “나에게 새삼스럽게 이 세계의 헛됨을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세계의 비어있음을 느꼈으니 말이다.” 그 체험은 그가 예닐곱 살 쯤,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에서 있었다.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아래 가만히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길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느낀 무의 인상이었다.”

그 이후 그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되씹는다. 더구나 그는 광대무변한 바닷가 근처에서 살았다. “얼마나 엄청난 공허인가! 바위들, 개펄, 물…. 날마다 모든 것이 전부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로 변하는 곳이니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각이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감각’이었다. 그 와중에도 상처가, 욕망이 그를 휩쓸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끝끝내 가 닿는 곳이 있다. “공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외발로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보상을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 

위대한 스승이 있어 그를 이끌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이 사색에 빠진 철학자에게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이 없다. 그러나 그의 글 이곳저곳에서 혜안이 작은 조각처럼 반짝인다. 고양이 물루는 말한다. “나는 저 꽃이에요. 저 하늘이에요. 또 저 의자예요. 나는 그 폐허였고 그 바람, 그 열기였어요. 가장한 모습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나요?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고양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대양 속의 소금같이, 허공 속의 외침같이, 사랑 속의 통일같이, 나는 내 모든 겉모습들 속에 흩어져 있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 모든 겉모습들은 저녁의 지친 새들이 둥지로 돌아오듯 나의 속으로 돌아올 거예요. 고개를 돌리고 순간을 지워버리세요. 생각의 대상을 갖지 말고 생각해보세요. 제 어미가 입으로 물어다가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도록 어린 고양이가 제 몸을 맡기듯 당신을 가만히 맡겨보세요.”

예전에 읽었던 책이지만 다시 읽으니 처음 본 것처럼 새롭다. 카뮈도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이를 굳이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었겠다. 책이 새롭게 읽힌다는 것은 나 또한 변했다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 변화가 반갑다. 저자도 말하듯이, “인간은 변할 수가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인간은 지금까지 변화밖에 한 것이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보이는 진리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61호 / 2020년 11월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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