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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근대의 사리신앙 ① - 신문 기사에 실린 불사리에 관한 일화들

일제강점기 ‘불사리’ 기사에 민중들 회한 달래

인도에서 발굴된 불사리 ‘대한매일신보’가 1909년 최초 보도
스리랑카 다르마팔라 스님 전한 불사리 기사와 봉안식 큰 화제 
불국사 사리탑 일본 반출됐다 귀환…사리기·불사리 끝내 못찾아

각황사 칠층석탑 낙성식 장면. 스리랑카의 다르마팔라가 기증한 불사리를 칠층석탑에 봉안하는 행사로 일반 시민들도 참관했다. 동아일보 1930년 9월15일.

우리나라에서 근대(近代)는 조선 왕조가 근대적 정치사회 체제를 갖추던 19세기 후반부터, 1910~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될 때까지로 설정하는 게 보통이다. 일제가 그들의 불교를 강권함으로써 우리 불교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불교계가 침체기에 빠진 시기라 사리신앙 자료도 매우 드물다. 

그런데 근대기부터 신문과 잡지라는 새로운 기록 매체가 등장했다. 신문은 속성상 굵직한 정치사회 뉴스부터 저잣거리의 흥미로운 사건까지, 사람들이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기들이 취재되고 지면에 실리기에 생활상과 풍속을 알려 할 때 유용한 자료가 된다. 또 불사리는 예나 지금이나 불교계에 국한한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던 분야였던 만큼, 당시 사리신앙의 일면을 엿볼만한 단서가 신문 기사 곳곳에 실려 있다. 

불사리에 관한 최초의 신문 기사는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6일자에 실린, 인도 페샤와르 부근 불적(佛蹟)에서 발견된 금동 사리기에 관한 소식이었다. 사리기에 담긴 수정 사리병에서 인골 3개가 나왔는데, 옛날 이곳을 여행했던 중국인이 남긴 여행기에 나오는 카니슈카 왕이 불골(佛骨)을 묻었다고 전해지는 곳과 일치하니, 이 유골이 곧 불골임이 분명하다는 내용이다. 1단짜리 단신(短信)이어도 1면에 실린 걸 볼 때 당시에도 불사리는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1913년 다르마팔라가 기증한 불사리를 각황사 법당에서 배관하는 행사 모습. 30본산 주지, 총독부 고위 관리, 유명인사 등 100여명이 참가했다. 매일신보 1914년 1월1일.

해외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불사리 봉안 관련 기사는 ‘대한매일신보’에서 이름을 바꾼 ‘매일신보’ 1913년 8월 13일자에 처음 실렸다. 인도에서 온 달마파라 스님이 우리나라 승려 대표에게 불골을 전달했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30본산 주지 일동이 금제 다기(茶器)를 선물했다는 내용이다. 이 불사리는 곧이어 대중에게 공개되는데, 같은 신문 10월 5일자 ‘석가불사리 봉안식’이라는 제목의 후속기사에 자세히 나온다. 

“접때 조선에 와서 각 사원과 그 밖에 여러 곳을 순찰하고 귀국한 인도 고승 달마바라 씨는 입국시 옛날 석가모니의 불사리를 가지고 왔다가 조선 승려 대표 이회광(李晦光, 1862~1932) 화상에게 전달했다. 이회광은 승려들과 결의한 뒤 드디어 장엄한 봉안식을 거행하기로 작정하고 봉안식을 준비하던 중. 3일간 일반에게 배관을 허(許)하기로 하였다 한다.”

기사에 등장하는 ‘인도 고승 달마파라’는 불교 부흥에 앞장섰던 스리랑카의 앙가리카 다르마팔라(Anagārika Dharmapāla, 1864~1933)이다. 불교를 알리기 위해 해외순방 하고 귀국하던 길에 우리나라에 들러 불사리를 기증한 것이다(이병두, 사진으로 보는 불교, ‘법보신문’ 2017년 3월 22일). 이 불사리를 은제 사리함에 모시는 행사가 12월 29일 현 수송공원 자리 각황사에서 열렸다. 이완용·장석주·박기양 등 정계 실세와 총독부 고위 관료들 및 유명 인사 백여 명 등이 대거 참석했을 정도로 이 불사리 배관 행사는 큰 화제였다. 대중들이 참배할 기회는 16년 뒤인 1929년에 주어져, 이 해에 열린 조선박람회 개막에 맞춰 10월 1일부터 20일까지 공개되었다. 3주 내내 참배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듬해 각황사 마당에 칠층석탑을 새로 세우고 정성껏 봉안했다. 1938년 각황사가 현 조계사로 옮길 때 이운되었고, 2009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뒤뜰로 한 번 더 자리를 옮겼다. 

불국사 사리탑. 통일신라의 걸작 사리탑으로, 1905년 일본에 불법 반출됐다가 1933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불국사로 돌아온 사리탑의 반출, 귀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매일신보’ 1933년 6월23일자 신문 기사. 

한편, 부산 범어사에서도 1938년 4월 15일에 다르마팔라가 전한 불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준공식이 열려 수만 명이 운집했다는 보도가 있다(‘매일신보’ 4월 21일). 사리탑 건립 준비에 3년이 걸렸다는 기사로 볼 때 다르마팔라가 전한 불사리는 각황사에 봉안한 것 외에 더 있었던 모양이다. 

석가모니의 고향에서 온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일은 억울하게 일본에 국권을 빼앗겨 나락에라도 빠진 듯 침통했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접한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불교계만이 아니라 일반사람들도 이를 통해 국운이 회복되어 하루빨리 식민치하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한마음으로 기원했는지 모른다. 

1933년에는 신문마다 사리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먼저 4월 1일자 ‘조선신문’에 금강산에서 발견된 불사리 소식이 3단 기사로 실렸다. 신라의 유서 깊은 사찰 발연사(鉢淵寺) 부근의 한 암벽 꼭대기쯤에 바위를 파내어 만든 감실(龕室)이 있었다. 이끼가 가득 끼어 있어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는데 한 인부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사찰에 그대로 알렸으면 될 일을, 그는 감실에서 사리기를 몰래 빼내 서울에 와서 1,500원(圓)에 팔려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보도였다. 1930년대 교사 월급이 30원 할 때니 적지 않은 금액이다. 작은 은제 상자 안에 진주 같은 작은 사리 1과가 들어 있었다는데, 아쉽게 이 사리기와 불사리가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후속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초여름으로 접어든 6월 하순, 신문들마다 불국사의 통일신라 사리탑이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28년 만에 돌아온다는 흥분 섞인 보도들을 쏟아냈다. 1905년 일본인이 내부인과 공모해서 밤중에 몰래 들어가 훔쳤고, 도쿄의 우에노공원 안에 있던 서양요리점 ‘우에노세이요우겐(上野精養軒)’ 앞마당에 버젓이 전시했다. 얼마 뒤 와카모토 제약사 사장 나가오 긴야(長尾欽彌)가 수만 원에 사들여 자택 정원으로 옮겨갔는데, 1933년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가 기증을 권유해 28년 만에 불국사로 귀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국보인 호류지(法隆寺) 목탑에 비견할 걸작’(‘조선신문’ 6월 18일자), ‘국보급 고미술품’ 등 당시 언론들이 극찬한 이 사리탑은 지금 불국사에 잘 모셔져 있다. 아쉬운 건 사리탑이 돌아올 때 이미 사리기와 불사리가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백여 년 전 우리가 겪은 통분의 역사였다. 한편으론 걸작 사리탑의 귀환을 통해 불교계가 단합하고, 나아가 불탑과 사리신앙을 다시 떠올림으로써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회한을 약간이나마 달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63호 / 2020년 12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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