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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무생법인(無生法忍)

기자명 현진 스님

모든 법이 공함을 깨달아 인내하면 지혜 성취

무생한 법에서 인내할 때만이
지혜가 생겨날 수 있음 강조
부파불교 시대 외도 피박에서
무아법 되살리려는 의도 담겨

제28 불수불탐분에, “만약 어떤 이가 항하사 모래 같이 많은 칠보로 보시한 공덕보다 일체법에 아(我)가 없음을 알고서 인(忍)에서 성취한 공덕이 더 클 것”이라 하였다. 일체법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안다는 것은 무아법(無我法)을 성취하였다는 것이요, 무아법을 성취한 상태에서 감내해냄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공덕은 그 크기가 갠지즈강 모래알 수보다 많은 칠보를 쟁여놓고 그것을 불보살님에게 세세생생 공양을 올려 쌓은 공덕보다 더 크다는 말인데, 이를 사자성어로 옮긴 것이 ‘무생법인’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일체법이 공하여 그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갖고 있지 않기에 생멸변화를 넘어서 있음을 깨달아서 그 진리에 편안하게 머물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더 나아가, 경전 가운데 ‘유마힐경’에선 “인연의 이치에 수순하여 다시 삿된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무생법인이라 하였으며, 또한 ‘대지도론’ 권50에선 “생겨나거나 사라짐이 없는 모든 법의 실상 속에서 그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며 통달하여 걸림이 없이 물러나지 않는 것”을 무생법인이라 서술하고 있다.

불수불탐분의 “일체법에 아(我)가 없음을 알고서 인(忍)에서 성취함”이란 서술은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을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이 부분의 산스끄리뜨 원문을 또한 우리말로 옮겨보면 “대승수행자가 실체가 없는 것이자 생겨남이 없는 것인 법 가운데에서 인내를 성취한다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무생법인’ 네 글자를 산스끄리뜨 원문의 내용에 근거하여 토를 달아보면 “無生한 法에서 忍을 성취함”이 된다.

결국 무생법인이란, 모든 법은 공하여 고정불변의 실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생멸변화를 넘어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한 모든 법의 상황에서 쉽사리 단멸상(斷滅相)을 내지 않고서 참고 견디어 인내함으로써 결국엔 진정한 지혜를 성취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무생법인이 무생(無生)한 법(法)에서 인내(忍)함으로써 성취하는 결과가 ‘지혜’라는 의미라면 결국 지혜가 성취의 최종 결과물임에도 ‘無生法忍’이라 하여 ‘忍’이 최종 결과물인 것처럼 글귀의 목적어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은 인내함을 통해야만 지혜가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대승수행자는 법의 단멸상을 심지어 시설(施設)해서도 안 된다 하였듯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자 생겨남이 없는 것인 무아무생(無我無生)의 법이라는 상황에선 중생이 쉽사리 단멸상을 내어 허무에 빠져버리는 과오를 범하기 때문에라도 인내함이 강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마라집 스님은 인(忍)이라 옮겼고 현장 스님은 감인(堪忍)이라 옮긴 산스끄리뜨끄 끄산띠(kṣānti)는 참고 견디는 그 자체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진정한 지혜까지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생법인의 인(忍)에 대해 육조혜능 스님은 모든 법에 통달하여 능소심(能所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였는데, 능소심이란 우리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흔히 나와 남을 분별하는 마음을 말한다.

무생의 모든 법 가운데서 나와 남을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인 인(忍)의 성취는 곧 지혜의 성취이기도 하다. 어차피 지혜를 뗏목 삼아 건너야 할 피안으로의 길은 그저 알고 이해하는 것만으론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이해되는 부분을 귀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不貴解處)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只貴不解處)”라고 하였으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귀하게 여겨 섣부른 망념을 부리지 않은 채 견디고 참아내는 감인(堪忍, kṣānti)이야말로 알음알이를 지혜로 전환시킬 수 있기에 그 공덕이 항하사 칠보공양의 공덕보다 크다고 설한 것이다.

대승불교가 흥기하는 시기는 어쩌면 대승수행자로선 브라만교를 비롯한 외도들로부터는 물론이요 심지어 부파불교의 일부 교파로부터의 온갖 종교적이자 철학적 핍박에 직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 핍박을 견디며 이미 많이 훼손된 부처님의 무아법을 되살리려면 아마도 무생법인의 인내는 긴요하였을 것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65호 / 2020년 1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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