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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59)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⑬ (4)‘중대’왕실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출자관념(出自觀念)-하

신라 5묘제도 시행은 ‘중대’ 왕실 정체성 확립하는 역사적 의미

‘중고’와 ‘중대’ 왕실 차이는 혈통 아닌 불교와 유교이념의 차이
‘성골’과 ‘진골’ 구분하면서도 이에 대한 객관적 설명 없어 혼란
소호금천씨 출자설도 중국적·유교적 이념 창출의 정치적 소산

김인문 묘비.
문무왕릉비 일부.

28대 진덕여왕(647~654)에서 29대 태종무열왕(654~661)으로 왕위가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대사건이었다. 이러한 시기구분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일치된 주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구분의 기준이 왕통의 변화, 즉 왕실의 신분이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강등되었다는 점에서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그런데 두 역사서 모두 성골과 진골의 구분 기준이나 이유에 대해 일체 설명이 없으며, 특히 성골 신분에 대한 설명 자료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그 구분의 기준이나 이유에 대해서 추측성의 각인각설이 제시되었으며, 심지어 성골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주장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관점을 달리해 왕실 신분의 변동이라는 시야를 벗어나, 넓게는 정치적・문화적인 변화, 좁게는 종교적・사상적 변화에서 시기구분의 역사적 의의를 찾는 새로운 방법의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그러한 방법론의 구체적 사례의 하나로써 왕실제사 제도와 왕실조상의 출자관념의 변화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시기구분의 역사적 의의를 추적해 보겠다.

먼저 신라 왕실 조상의 제사 제도에 관한 자료로서는 ‘삼국사기’ 권32, 제사지(祭祀志)의 서문에서 포괄적인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살펴보건대, 신라 종묘(宗廟)의 제도는 제2대 남해왕(차차웅) 3년(6A,D.)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의 묘(사당)를 세워 4시(춘하추동)에 제사지내고, 친누이동생 아로(阿老)가 제사를 맡게 하였다. 제22대 지증왕 때는 시조가 내려와 태어난 곳인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세워 그를 제사하였다. 제36대 혜공왕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5묘(五廟)의 제도를 정하였다. (13대) 미추왕을 김성(金姓)의 시조로 삼고, 또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적이 있다고 하여 모두 대대로 헐지 않는 신위(世世不遷之宗)로 삼고, 거기에 친묘(親廟) 2신위를 합해 5묘로 하였다.” 이 서문은 ‘삼국사기’ 편찬의 책임자인 김부식이 신라 왕실 종묘 제사의 역사를 종합 서술한 것인데, 시조묘・신궁・5묘 등 3차례의 변화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왕실 조상에 대한 제사 제도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가발전과정에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첫 번째의 시조묘는 혁거세거서간을 신위로 모셨다는 점에서 이의가 없으며, 제사 주관자가 여성이었다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다음 신궁은 처음 설치된 시기, 그리고 제사 대상인 시조가 누구인가에 대해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신궁의 설치시기에 대해 ‘삼국사기’ 조지(照知 또는 炤知, 毗處)마립간본기에서는 지증왕대(500~514)보다 앞선 조지왕 9년(487)과 17년(495)에 이미 신궁이 설치되어 제사를 지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제사지와 본기 사이의 설치 연대 기록의 차이에 대해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지증왕은 조지마립간의 6촌 재종제(‘삼국유사’에서는 5촌 당숙)로서 조지마립간 9년에 이미 51세의 장년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64세에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고’는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시기에 해당되지만, 사실상 ‘중고’시기의 왕통을 연 왕은 지증왕으로서 왕권강화와 지배체제 정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신궁도 그러한 개혁의 일환으로 정치실권을 장악한 조지마립간 9년에 처음 설치하였고, 즉위한 이후 국가적인 제도로써 완비하였던 사실이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혼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본다. 

이로 보아 신궁의 설치는 지증왕대의 정치개혁에 상응하는 조치였던 것이며, 이후 ‘중고’시기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한 나물마립간 직계의 김씨왕실 친족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종교적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본다.

다음 5묘는 전통적인 신궁과 다르게 중국 유교의 제도를 새로 받아들인 것인데, 앞서 인용한 제사지에서의 36대 혜공왕대의 설치설(‘삼국사절요’에 의하면 혜공왕 12년, 776)과는 다르게 신문왕본기는 이미 31대 신문왕 7년(687)에 설치되어 태조대왕・진지대왕(舍輪)・문흥대왕(龍樹)・태종대왕(春秋)・문무대왕(法敏) 등 태조와 직계 4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드렸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29대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자 곧 죽은 아버지 용수(춘)를 문흥대왕으로 추봉하였고, 사망하자 무열대왕이라는 중국식의 시호와 함께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던 사실을 보아 ‘중대’ 초기부터 5묘제는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신문왕대에 이르러 태조와 이소・이목(二昭・二穆) 4친의 신위를 모시는 제도로 완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5묘의 설치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천자 7묘, 제후 5묘에 대한 규정을 따른 것으로써 태종무열왕의 유교이념에 의거한 정치・문화개혁에 상응하는 조치였다. 태종무열왕대 이후의 5묘제 시행은 ‘중고’왕실과 구분되는 ‘중대’왕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중고’시기의 신궁에 대한 친사(親祀)도 계속되었던 것을 보아 전통의 계승이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용수가 진평왕의 4촌이자 사위였고, 춘추가 진평왕의 외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제부로서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계통과 용수-춘추 계통 사이에서 신분상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타당성이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중고’왕실과 ‘중대’왕실의 차이는 혈통상의 차이보다는 ‘중고’의 불교이념과 ‘중대’의 유교이념 차이라는 사상적・종교적 이념의 차이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가진 주장이다. 5묘제는 이후 ‘중대’말기인 36대 혜공왕대(765〜780)와 ‘하대’초기인 40대 애장왕대(800〜809) 등의 시기에 따라 변천을 거듭하게 되는데, 왕실의 세계(世系)와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중대’왕실의 제사 제도인 5묘제의 시행과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신라 김씨왕족 시조의 연원을 중국 상고의 전승에 나오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에서 구하는 이른바 ‘소호금천씨 출자설(少昊金天氏出自說)’이다. 소호금천씨 출자설은 현존하는 금석문 자료, 그리고 ‘삼국사기’와 최치원의 ‘고운집(孤雲集)’ 등의 문헌자료에 전하고 있다. 금석문 자료를 조성 시기의 순서로 나열하면, ‘김유신묘비’(문무왕 13년; 673년경 건립, 찬술자 미상), ‘문무왕릉비’(신문왕 2년; 682년 건립, 찬술자 급찬 국학소경 金□□), ‘김인문묘비’(효소왕 4년; 695년경 건립, 찬술자 미상), ‘흥덕왕릉비’(경문왕 12년; 872년경 건립, 찬술자 미상), ‘김유신비’(경문왕대 건립 추정, 국자박사 薛因宣 찬술), ‘삼랑사비’(경문왕대 건립 추정, 朴居勿 찬술, 姚克一 글씨) 등인데, 7세기 후반과 9세기 후반 2시기에 집중적으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문헌 자료로서는 ‘삼국사기’권41 김유신전과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말년조 사론을 들 수 있는데, 전자는 7세기 후반의 ‘김유신비’, 후자는 9세기 후반의 ‘김유신비’와 ‘삼랑사비’를 인용하고 있다.

김유신전 :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김)유신비’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다”라고 하였으니, 남가야(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와 신라는 같은 성씨였다. (‘삼국사기’권41) 사론(史論) : 신라 고사(古事)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金櫃)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했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신(臣)이 역사서를 편찬함에 그것이 오랜 전승이므로 그 말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또 들으니,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28,의자왕 말년조) 금석문 : 현존하는 단간비편들은 글자 결실이 심해 전후 문맥이 순조롭게 연결되지 않지만, 신라 왕실의 선대 가운데 ‘소호금천(少皥金天)’ ‘화관지후(火官之後)’ ‘투후제천지윤전7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 ‘15대조성한왕(十五代祖星漢王)’ 등의 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 인명 가운데 소호금천은 소호금천(少昊金天)으로 표기하기도 하며, 이름은 지(摯)이다. 중국 전설상의 5제의 한 사람인 황제(黃帝, 軒轅)의 아들인데, 태호포희씨(太昊庖犧氏)의 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소호(少昊)라고 하였고, 오행설의 금덕(金德)으로 왕이 되었다고 하여 금천씨(金天氏)로 불렸다고 한다. 다음 화관지후는 화관이 염제(炎帝) 신농시(神農氏)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로 전하는 황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투후제천지윤전7엽의 투후는 한무제 때 김일제(金日磾,134~86 B.C.)를 가리키는데,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서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토벌할 때 한(漢)의 포로가 되었다가 망하나(莽何羅)의 난 때 한무제를 구출한 공으로 총애를 받아 투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제천지윤전7엽이라는 말은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했다는 고사에 따라 한무제로부터 김성(金姓)을 하사받았고, 그 자손 7대가 내시(內侍)로 혁혁한 번영을 전승하였다고 한다. 끝으로 15대조 성한왕은 문무왕의 15대조가 성한왕으로서 하늘에서 강림하여 신령스러운 선악(仙岳)에서 탄생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자료 검토의 결과를 종합하면, 7세기 후반 신라왕실에서는 김알지(金閼智)를 김씨왕족의 시조로 하는 종래의 전승과 다르게 김씨 왕실의 연원을 중국 상고의 소호금천씨에서 구하는 새로운 출자설을 표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왕실이 성을 김씨로 한 이유를 소호금천씨의 후예였기 때문이라고 하여 김씨성의 유래를 소호금천씨에서 찾고 있었다. 또한 투후 김일제의 고사를 인용한 것도 그의 아버지 휴도왕이 금인을 만들어 제천하였기 때문에 한무제로부터 김씨성을 하사받았던 사실에 가탁하여, 문무왕 선대의 조상 가운데 김씨성을 최초로 칭했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문무왕에서 시조인 성한왕에 이르는 계보를 15대로 명기하고 있어서 성한왕의 실체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성한왕에 대해서는 김알지(金閼智), 알지의 아들인 세한(勢漢), 알지의 7세손으로 김씨 가운데 최초에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 태종무열왕 이후 5묘제를 시행하면서 신라의 창업지주인 태조대왕에 비정하기 위해 안출해 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등의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상의 연원과 시조의 문제는 사실성 여부를 추적하기 보다는 앞선 ‘중고’시기의 왕실이 인도의 전륜성왕과 석가불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설화인 진종설화를 창안함으로써 인도적・불교적 신성관념에 근거한 성골 신분을 과시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대응으로써 ‘중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중대왕실의 입장에서 그것과 구별되는 중국적・유교적 이념 창출의 정치적 소산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인척 관계이자 정치적 동지로써 새로운 시대를 연 김유신 가문도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을 신라의 성한왕과 같은 15대조로 추앙, 종묘에 합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한 같은 김씨성(신라 김씨와 구별하여 신김씨)을 칭하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65호 / 2020년 1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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