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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무로 도시 경계인들에게 던지는 독백

  • 불서
  • 입력 2020.12.21 14:14
  • 수정 2020.12.21 14:30
  • 호수 1566
  • 댓글 1

‘빈 소쿠리’ / 이형근 지음 / 불교문예

‘빈 소쿠리’

‘세상에 흔하디흔한 게 시인인데 뒤늦게 뭔 시를 쓴다고 하느냐’ 거나, ‘하던 일이나 잘하지’ 라는 타박도 들었다. 하지만 꼭 시를 쓴다기보다 세상을 살면서 그때그때 적어두었던 것들이 용케도 강산이 몇 번이고 바뀌는 사이에 빛바랜 대학노트 서너 권으로 남았다. 그 가운데 77편의 시를 갈무리해 이 책 ‘빈 소쿠리’로 엮었다.

사는 곳은 강화 마니산 하늘재, 중국 산동성 칭다오에 있는 차 학교와 문화원에서 찻잎을 덖으며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이형근 시인이다. 그는 산속 외딴집에서 태어나 도시 산동네에서 자취 생활을 할 때 숙명적인 고독과 생사의 경계에서 소피스트 흉내를 내며 살았었다.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다 세상에 온 죄로 사는 것이고 살아온 죄로 죽어야 하는 것뿐인데 사는 건 오롯이 사는 게 목적”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를 “이런 생사관의 행각에서 노가리 한 줄 구워 한 탁배기 들이키며 스치는 인연들에 토설하는 독백”이라고 말한다. 시를 쓴 게 아니라 그저 살아온 삶을 옮긴 것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삶이 그저 살아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고 의지를 갖춰 살아온 삶이기에 마치 오랜 세월 수행 정진한 선사들이 전하는 말이라 할 만큼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물을 빚어 빛을 품은 것/ 생명은 그렇게 잉태되어/ 제 형상에 제소리를 갖는다/ 사물은 언어를 낳고/ 언어는 사물을 기른다/ 사물이 된 언어도 생물이라/ 쉼 없이 생멸하며/ 우리의 시간을 이어간다/ 이 끝없는 시공을/ 틀에 잠긴 시선으로 담은/ 서툰 풍경 사진인 것을 -‘흑백사진들’”

시에서 훈습된 자아를 해체하고 현상을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수행자의 비움만큼이나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의 역사에서 우리에게 학습된 언어는 신과 같은 존재 자체이기에 자연계의 생멸 자체가 본래 자성이 없는 공함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에 본연이며 선이라 할 수 있다. “일체가 고요하다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데/ 숨 안에 숨을 세다가/ 바람이 흔들면 쪼그라들면서/ 그저 바위틈에 한 줄기 풀이야 -‘적멸성불록’”라고 말하는 이 시처럼 말이다.

“시인의 언어 또한 언어도단이어야 한다. 아기 엄마가 아기를 생각하는 그 본 마음 자체이고 채울 것도 비울 것도 없는 애당초 빈 소쿠리일 뿐이다. 늦가을 별빛과 쓰르라미와 화자가 시 공간의 동일체이니 언어는 언어 이전의 느낌이 먼저 닿아야 자연과 합일치 된다. 그것이 언어의 순수성이고 굳이 언어의 태성이라 표현하고 싶다”고 말하는 시인의 시에는 공(空), 허(虛), 무(無)가 녹아 있다. 그렇게 공‧허‧무로 도시의 경계인들에게 툭 던지는 독백으로 아픈 명제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문태준 시인이 “경책과 같은 시편들은 무심한 듯이 툭툭 던져 내놓는데 그 언어가 사람을 놀라게 한다. 때로는 무애하고 때로는 붙들려 있는 마음의 행로를 체화해서 표현한 시인의 시는 새로운 불교시의 진경을 보여준다”고 찬사를 보낸 이형근 시인의 시에서 불교를, 그리고 삶을 만날 수 있다. 1만원.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566호 / 2020년 12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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