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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60)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14) (5) 맺음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 - 상

성골과 진골은 혈연적으로도 정치적 위상에서도 전혀 차이 없어

중고·중대는 삼국항쟁과 삼국통일 완수라는 시기적 차이 존재
일연은 불교 추구한 ‘중고’에, 김부식은 유교이념 ‘중대’에 방점
중고·중대 모두 왕실 안에서 극심한 근친혼, 신분 구분 무의미

사적 182호 경주 선덕여왕릉 전경. 문화재청 제공
사적 182호 경주 선덕여왕릉 전경. 문화재청 제공

한국고대사 기본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역사를 3기로 구분한 점은 일치하지만, 시점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삼국사기’는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36대 혜공왕대(765~780)를 ‘중대(中代)’로, 그 이전과 이후를 ‘상대(上代)’와 ‘하대(下代)’로 구분하였다. 반면 ‘삼국유사’는 23대 법흥왕대(514〜540)~28대 진덕여왕대(647〜654)를 ‘중고(中古)’로, 그 이전과 이후를 ‘상고(上古)’와 ‘하고(下古)’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삼국사기’ 편찬자 김부식이 유교사관에 의거하여 유교정치이념을 추구하던 ‘중대’에 방점을 찍은 반면, ‘삼국유사’ 찬술자 일연은 불교사관에 의거, 불교정치이념을 받아들인 ‘중고’에 방점을 찍은 결과였다.

역사학계에서는 왕호의 차이를 기준으로 ‘중대’를 한식시호시대(漢式諡號時代), ‘중고’를 불교식왕명시대(佛敎式王名時代)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중대’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유교정치이념을 받아들여 강력한 왕권과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수립함으로써 신라의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고 한다면, 바로 앞선 ‘중고’는 공화제적인 6부체제를 극복하고, 불교정치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를 모색하는 한편, 삼국항쟁에 뛰어들어 삼국통일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본고는 60회에 걸쳐 ‘중고’시기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서 여러 각도에서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러한 내용을 종합하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중고’왕실 세계(世系)와 ‘중대’왕실을 개척한 용수-김춘추계의 혈연관계, 둘째 ‘중고’시기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수립과정과 용수-김춘추 부자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 셋째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의 사회적 역할 등이다.

먼저 ‘중고’시기는 23대 법흥왕부터 시작된 것으로 구분되지만, 실제 ‘중고’ 왕통을 연 것은 22대 지증왕(500~514)이었다. 지증왕은 21대 소지마립간(479~500)의 6촌 재종제이자, 19대 눌지마
립간(417~458)의 외손자로서 64세의 나이로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영일 냉수리비’에 의하면 그의 소속부는 사탁부였고, 갈문왕의 직위를 갖고 있었다. 지증왕은 모즉지매금왕(23대 법흥왕)과 사부지갈문왕(‘삼국사기’에서는 입종갈문왕) 두 아들이 있었다. ‘울진 봉평비’에 의하면 왕위를 이은 큰 아들은 탁부, 둘째 아들은 사탁부로 소속부가 나뉘어져 있었음이 주목된다. 다음 법흥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입종의 아들이자, 법흥왕의 외손자로서 왕위를 이어 24대 진흥왕이 되었다. 왕실 안에서 극심한 근친혼이 이루어진 것은 권력을 다른 가문과 나누지 않으려는 정치적 산물로써 사회인류학의 일반적인 친족집단 이론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3~5촌 사이의 근친혼은 ‘중고’시기 내내 반복되었음을 볼 수 있다. 진흥왕의 두 아들 가운데 큰 아들 동륜은 일찍이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사망함으로써 왕위는 둘째 아들에게 이어져 25대 진지왕이 되었다. 진지왕이 즉위 4년 만에 폐위되고, 왕위는 진지왕의 족하이자, 동륜태자 아들인 26대 진평왕으로 이어졌다. 주목되는 사실은 진평왕의 모친인 만호부인이 입종갈문왕의 딸이었다는 사실이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큰 딸이 왕위를 이어 27대 선덕여왕이 되었다. 주목되는 사실은 선덕여왕의 배우자가 3촌 숙부인 음갈문왕(백반갈문왕으로 추정)이었다는 것이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인물은 4촌 자매이자, 국반의 딸이 왕위를 이어 ‘중고’왕실의 마지막 왕인 27대 진덕여왕이 되었다.

한편 즉위 4년 만에 폐위된 진지왕에게는 유복자로 추정되는 용수(용춘)이 있었는데, 용춘은 진평왕의 딸이자, 5촌 당질인 천명부인과 결혼하여 김춘추를 출생하였다. 그러므로 ‘중대’ 왕실을 연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제부로서 ‘중고’ 왕실의 일원이었으며, ‘중고’왕실의 일반적인 근친혼의 결과였다. 특히 ‘중고’시기 왕권강화와 영역확장에 커다란 업적을 이룩한 진흥왕의 부모가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과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이었고, ‘중고’시기 왕권안정과 지배체제 정비에 중심 역할을 수행한 진평왕의 부모가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와 입종갈문왕의 딸 만호부인이었다. 그리고 ‘중대’왕실을 새로 개척한 김춘추(태종무열왕)의 부모가 진지왕의 아들 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었음은 진흥왕・진평왕의 부모 경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28대 진덕여왕에서 29대 태종무열왕으로의 왕위 교체에서 굳이 변화의 의미를 찾는다면, 6촌 재종형제 사이의 왕위교체였다는 점에서 앞서 21대 자비마립간에서 22대 지증왕으로의 왕위 교체와 비교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동륜태자-진평왕-선덕여왕, 또는 동륜태자-국반-진덕여왕의 계통은 성골 신분인 반면, 진지왕-용수-김춘추 계통은 진골로 강등되어 신분의 차등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는 점이다. 사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두 역사서에서는 성골과 진골 사이의 신분의 구분 근거나 이유에 대해서 일체의 설명이 없다. 근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모계설(母系說)・배우자설(配偶者說)・정치적 이유설・ 친족집단의 분화설・추존설 등 각인각색의 주장만이 난무한 상황이다. 사료상으로 혈통상의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성골 신분의 비실재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실만이 확인될 뿐이다. 결국 혈통의 문제로써 성골과 진골의 신분 차등을 찾는 법제적・사회사적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관점을 달리해서 새롭게 사상적・종교적 접근방법을 강구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한편 ‘중고’시기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수립과정과 용수-김춘추 부자의 정치적 역할과 위상을 검토해 볼 때에도 성골과 진골 사이에서 신분 차등의 이유와 근거는 찾을 수 없다. 고대국가 발전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지배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한 것은 22대 지증왕대부터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이면에는 사회경제적인 발전이 전제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대 나물마립간 이후 폭넓게 보급된 철기문화로 인해 농업과 상업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지증왕대 전후하여 저수지의 축조, 우경(牛耕)의 시작, 농업의 장려정책, 우역(郵驛)과 도로의 정비, 우거(牛車)와 주즙(舟楫)의 사용, 서울의 방리(坊里) 정비와 시장의 개설 등 경제에 관한 기사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집중적으로 수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지증왕대 지배체제 운영의 실상은 ‘냉수리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재산의 소유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6부의 대표들이 회의하여 결정하고 공동의 명으로 시행케 한 사실을 돌에 새긴 일종의 행정문서의 성격의 자료이다. 지증왕 4년(503) 9월 25일에 6부 가운데 사탁부의 지도로갈문왕(지증왕)을 비롯하여 3부의 대표 7인이 참석하였는데, 모두 ‘왕(王)’으로 호칭하는 일종의 공화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달인 10월에는 국호를 ‘신라(新羅)’. 왕호를 ‘왕(王)’으로 확정하고, 지증왕 이외에는 아무도 왕을 칭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크게 강화시켰다. 그리고 순장을 금지하고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주군제(州郡制)를 시행하여 이사부를 실직주(悉直州)의 군주로 파견함으로써 중앙집권화의 길로 들어섰다. 지증왕을 이은 법흥왕대는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백관공복제의 실시 등 일련의 정치개혁을 통하여 중앙집권화정책의 추진을 서둘렀다. 그런데 법흥왕 11년(524)에 수립된 ‘봉평비’에 의하면, 국왕도 탁부라는 한 부의 대표자격으로 참여하는 6부회의 전통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뒤 불교의 공인, 상대등의 설치, 연호의 제정을 통하여 국왕은 6부 체제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지위로 상승하여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을 칭하게 되었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대는 병부령 1인을 증원하고 군사조직을 정비하면서 삼국간의 항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또한 큰 아들 동륜을 태자로 책봉하여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기도하였다. ‘중고’ 왕실 가운데 생전에 태자를 책봉한 유일한 예였으나, 일찍 사망함으로써 둘째 아들인 진지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데 그는 4년 만에 귀족회의에 의해 폐위되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왕위는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이 계승하면서 전반기에는 중앙행정관서들을 정비하고, 후반기에는 왕궁・양궁・사량궁 등 3궁을 통합 관리하는 내성을 설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아들이 없어 딸인 선덕여왕이 왕위를 잇게 되자, 종실의 대표인 을제가 섭정을 맡아 귀족연합의 과두체제로 운영됨으로써 왕권은 불안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당시 정치권력의 실세로서 상대등(上臣) 수품과 내성 사신(私臣) 용수 2인이 귀족과 왕실을 각각 대표하였고, 여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선덕여왕 말년에는 마침내 새로 상대등이 된 비담이 반란을 일으켜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반란 중에 선덕여왕은 사망하고, 사촌자매인 진덕여왕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반란 진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한 김춘추와 김유신이 실세로 부상하였다. 진덕여왕대도 정국은 귀족연합의 과두체제로 운영되었는데, 명목상 대표는 최고 원로인 상대등 알천이었으나, 실권은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넘겨져 있었다. 특히 외교권은 김춘추, 군사권은 김유신이 장악하였는데, 동아시아의 국제전으로 전개된 삼국통일전쟁에서 외교권과 군사권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요소였음을 감안하면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김춘추의 부친인 용수는 진지왕의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사촌형인 진평왕 측근의 가신으로 성장하였으며, 진평왕의 딸과 결혼하여 김춘추를 출생하였다. 용수는 내성의 사신이 되어 양부(탁부)와 사량부(사탁부)를 왕실 중심으로 통합 관리케 됨으로써 2부 중심의 6부체제를 완전히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체제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선덕여왕대 실추된 여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종교적 신성의 상징물인 황룡사 9층탑 조성을 주도하였다. 부친의 유산을 이어받은 김춘추는 진덕여왕대 외교권을 장악하여 나당군사동맹을 체결하였고,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치개혁과 문화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사실상 ‘중대’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중첩적인 혼인으로 처남과 매부 관계이자, 뒤에는 장인과 사위 관계를 맺은 인척이면서 정치적 동지로 함께 ‘중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삼국통일을 이룩한 두 주역이 되었다. 특히 진덕여왕대 설치된 여러 중앙행정관서 중에서 집사부 중시(中侍)는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 왕실을 관리하는 내성 사신과 함께 국가권력의 3각 축을 이루게 되었으며, ‘중대’의 강력한 왕권의 기반을 이루었다. 결론으로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시기의 용수-김춘추 부자의 정치적 역할과 위상을 평가할 때, 혈연상으로 두 계통 사이에서 성골과 진골을 구분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위상에서도 신분상의 차이를 설정할 수 없다고 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67호 / 2020년 12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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