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재가자, 각자의 역할 평등한 것으로 인식하면 불국토 건설될 것
출·재가자, 각자의 역할 평등한 것으로 인식하면 불국토 건설될 것
  • 성태용
  • 승인 2020.12.31 20:24
  • 호수 15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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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재가자는 평등한가

출가자 중심의 사유 지양하면 모든 사람 주체되는 불교 될 것
대승불교 속 출·재가자, 전문가·후원자로서 수평적 역할해야
평등 관계 이룰 때…삶의 영역, 깨달음 지향하는 것으로 확장 

우리말 ‘삼귀의’의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는 참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스님들은 모두 거룩한가? 거룩하지 않은 스님들께는 귀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스님들이 ‘삼귀의례’를 할 때는 자신을 포함한 스님들께 귀의한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고승대덕들에게 귀의한다는 마음으로 이 ‘삼귀의례’를 하는 것인가? 이 우리말 ‘삼귀의’는 스님들 용이 아니라 재가자용일 뿐인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운강석굴 제6굴에 조각된 ‘유마경변상도’. 가운데 앉아있는 석가모니 부처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문수보살, 우측에는 유마힐 거사가 앉아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운강석굴 제6굴에 조각된 ‘유마경변상도’. 가운데 앉아있는 석가모니 부처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문수보살, 우측에는 유마힐 거사가 앉아있다.

첫 번째 물음 “스님들은 모두 거룩한가?”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스님들은 그 개개인의 덕성과 행실에 관계없이 모두 거룩한 존재라면, 이것은 “사람 위에 스님 있다”는 말이 된다. 일반 사람들에서 한걸음 진화한 존재가 바로 스님이 되는 것이다. 재가자의 삶 속에는 구원의 길이 없고, 출가자에만 구원이 있다. 그러니까 재가자의 삶은 저열한 삶이요, 그것을 벗어나서 출가자가 되는 것은 한 단계의 한 차원 높은 삶으로의 진화이다. 그 출가자의 삶 속에서만 깨달음은 성취된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는 이러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불자들의 의식 심층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있다. 예를 들어 가장 널리 읽혀지는 발원문인 ‘이산교연 선사 발원문’을 보라. “이 세상의 명(命)과 복(福)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 세상 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라는 구절이 있다. 명과 복의 추구와 깨달음의 추구를 이생과 내생으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내생의 깨달음 추구는 내생에 ‘동진출가’를 하여 이루는 것으로 말해진다. 이런 관점에 서면 출가자는 명과 복을 추구하는 삶을 넘어선 존재요, 재가자들보다 한 차원 진화한 존재이다. 그 스님들 각각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스님들은 근본적으로 귀한 존재이니, 그분들을 공경하는 것은 한 차원 낮은 존재인 재가자들의 의무이다. 그러니 스님들 개개인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도 해서는 안 된다. 차원 낮은 존재가 차원 높은 존재의 작은 흠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다. 이것이 “스님들은 모두 거룩하다”는 관점에서 이끌어져 나오는 결론이다.

이런 관점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힘들 것이다. 스님들은 존경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엄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부처님 당시에도 스님들이 법답지 않은 행태를 보이자 재가자들이 공양을 끊어버린 일이 있었다. 스님들 개개인들이 귀의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출가자 자체를 높은 차원의 존재로 보게 되면 재가자의 일상적인 삶 전체가 불교 밖으로 소외되고 만다. 욕망의 추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영위는 높은 차원의 존재인 출가자들이 넘어서버린 저열한 것이다. 그런 삶에 매달리고 있는 재가자들은 모두 불교의 궁극적 지향에서 소외되며, 이생에 복을 많이 지어 내생에 출가자가 되기를 바라며 살아야 한다. 

출가자 중심으로 불교의 교단이 맥을 이어오면서 사제계급이라 할 수 있는 출가자 중심의 사유가 이런 경향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운동의 중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이런 출가자 중심의 사유를 지양하고, 소외되었던 우리 삶 전체를 불교의 영역으로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불교, 모든 존재들이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에 동참하는 불교가 되는 것이 대승불교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대승불교의 틀 속에서 출가자와 재가자는 수평적 분업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출가자는 재가자들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수행의 문제에 대한 일종의 전문가 역할을 한다. 재가자들은 출가자들이 모든 힘을 쏟아 부어 개발한 여러 방법들을 현실의 삶에 적용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개인 수행의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 불국토 건설의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이것이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분담이다. 

본디 이렇게 분업구조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전문적인 일에 뛰어드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철학적 지식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하여 모든 사람이 철학의 연구에 매달리면 어떻게 될까?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또 그런 특별한 영역의 지식은 자질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쏟아 개척하고 그 결과를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전문가들에게 일정정도의 예우를 하고 또 그들이 그것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줄 필요가 있다. 대개 그런 전문적인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하며, 또 힘을 오롯하게 모아야 한다. 일상적 삶 속에서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며 그런 일들을 수행하는 것은 힘든 경우가 많다. “성적인 충동을 만족시키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자갈로 밥 짓기와 같다”는 말도 있었다. 일반적인 공부만 하더라도 힘을 딴 데 쏟아가면서 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학자라는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인 문제, 이성에 대한 욕구 등에서 초연한 덕목들이 요구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인 전문가들도 그럴진대 하물며 지고의 가치라 할 수 있는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에 대한 전문가라면 어떠하겠는가? 당연히 모든 힘들을 모아서 그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활동들에도 조금의 힘도 쓰지 않고, 모든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길에 몸을 던진 전문가가 바로 출가자이다.

앞에서 전문가들에게는 일정정도의 예우가 따른다는 말을 하였다. 일정정도 일상인들이 누리는 욕구충족의 삶을 희생시켜야 하는 경우가 많은 전문가들에게 그러한 반대급부가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우는 전문가 개인들에게 바쳐지지만, 그 근원을 따지면 그 전문가 집단 또는 계층의 필요성을 인정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출가자에 대한 예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출가자라는 집단, 직업에 바치는 예우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는 표현은 근본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스님들’에는 집단, 또는 공동체 개념이 없다. 개개인 스님들일 뿐이다. 출가자 공동체에 대한 귀의라는 의미가 살아나도록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성격의 예우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며, 또한 그들에게 요구되는 품성과 덕목을 충실하게 지키기를 요구하는 측면도 있다. 자연히 그들이 그러한 품성과 덕목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을 때 엄한 비판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출가자는 다른 전문직과 비교해도 전혀 차원이 다를 정도의 특별함을 갖는다. 다른 전문직은 어느 정도의 예우를 바치고 적절한 선에서의 생활보장을 하는 보수를 약속하는 선에 그친다. 이에 비해 출가자는 일체의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든 힘을 수행에만 쏟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 생활 전체를 오로지 재가자들의 보시에 의존한다. 그만큼 그들에게 바치는 존경과 예우 또한 특별함을 지니게 된다. 거의 모든 종교의 사제계급이 어느 정도는 그런 위상을 지니지만 불교의 출가자는 좀 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정말로 철저한 분업구조인 것이다.

이런 분업구조는 분명히 수평적인, 평등한 관계의 분업구조이다. 그러하기에 출가자라는 매우 특별한 전문가에게 바치는 예우와 공경이 수직적 차별로 전환되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수직적 차별화로 이어지고, 출가자가 인간의 진화형이라고 인식되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난다. 출가자에게 요구되는 규범들이 근본적으로 고귀하다는 인식이 오게 되면 어찌되는가? 욕망은 그 자체로 저열한 것이며, 심하게 말하면 제거되어야 할 ‘악(惡)’이 된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악으로 점철된 것이며, 재가자들은 언제나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출가자에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되는 ‘성(性)’적인 욕망의 배제가 불교의 근본 가치라고 생각되어지면? 일상적인 건전한 부부생활까지도 죄의식에 사로잡히면서 해야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재가자와 출가자를 평등한 수평적 분업의 관계로 볼 때에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욕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아집에 사로잡혀 자신만을 위하는 것으로 쓰이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연기적 눈이 뜨이면 그것은 서원으로 전환된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불교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영역 전부가 부처를 이루고 불국토를 건설하는 원동력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태용 건국대 명예교수
성태용 건국대 명예교수

이러한 이야기가 출가자에 대한 공경을 해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정말로 특별하고도 특별한,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한 곳에 힘을 오롯하게 쏟는 출가자에 대한 공경은 불교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출가자에 대한 지극한 공경은 그들이 자부심과 권위를 지니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며, 그 결과물은 재가자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돌아온다. 한편으로 출가자는 자신들의 수행에 힘을 쏟는 외에도 재가자들의 수행과 불국토 건설에 지남이 되는 방편들을 제공해야 한다. 단순히 “우리 출가자와 같은 방식으로 수행하라” 하는 것은 재가자의 삶을 망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실적인 삶 속에 펼쳐내는 방편, 또 일상성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방편들을 꾸준히 제공해야 한다. 수평적 분업이라는 틀에서 본다면 이 또한 출가자의 ‘의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각각 자신의 역할과 분수를 수평적 차원에서 평등한 것으로 인식할 때 참으로 아름다운 불교의 공동체, 사부대중의 공동체가 이룩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공동체의 확대가 바로 불국토 건설인 것이다.

 

[1568호 / 2021년 1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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