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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타비(我是他非)와 개시개비(皆是皆非)

기자명 성진 스님

매년 한해의 끝자락에서 대학교수들이 우리사회를 돌아보며 사자성어를 선택해 발표한다. 올해도 2020년 경자년(庚子年) 한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발표했는데 바로 ‘아시타비(我是他非)’라는 신규 성어를 선정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 사자성어를 처음 들었을 때 공감과 동의보다 약간의 걱정과 작은 아쉬움이 먼저 들었다.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택한 분들의 마음은 경자년 한해 우리 사회 모순된 현상들을 이 네 글자로 표현하여 경종을 울리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로 인해서 오히려 우리 사회가 누가 ‘아(我)’이고 누가 타(他)인지를 놓고 다시 옳고(是), 그름(非)을 따지는 ‘시시비비(是是非非)’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시시비비(是是非非)라는 말 또한 원래의 의도와 달리 정반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듯이 말이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조선 후기의 인물로 우리에게는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더 알려진 김병연(金炳淵)이 ‘시(是)와 비(非)’ 단 두 글자로만 지은 ‘시시비비’라는 제목의 다음 시에서 나왔다고 한다.

‘시시비비비시시(是是非非非是是) 시비비시비비시(是非非是非非是) 시비비시시비비(是非非是是非非) 시시비비시시비(是是非非是是非), 즉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으며,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음이 아니다.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이 그른 것이 아니며, 옳다는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함이 도리어 이 그른 것을 옳다 함이다.’

이 시(詩)의 내용을 보듯이 도대체 무엇이 옳다는 것인지, 무엇이 그르다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이 시에서 ‘시(是)와 비(非)’,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또한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서로의 옳고 그름을 가리고자 할 때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아시타비(我是他非)에 대한 아쉬움은 또한 성찰이나 뒤돌아봄을 통해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멈추고 우리 사회가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르침이 함께 포함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바람의 감정이다.

얼마 전 어느 대학에서 갈등협상전문가 과정을 공부하면서 잊히지 않는 사자성어를 다시 한번 새기게 되었다. 갈등협상을 외국에서 전공하신 담당 교수님이 1400여년 전 이미 갈등 해결에 대한 방안을 논리적으로 제시한 위대한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원효 스님이라고 말했다. 원효 스님의 화쟁사상이 지금 시대의 갈등을 해결하는데도 큰 가르침과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칠판에 쓴 사자성어는 ‘개시개비(皆是皆非), 모두 옳고 모두 그르다’ 였다. 개시개비(皆是皆非)는 ‘열반경'에 나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코끼리 모양을 말하는 ‘맹인모상(盲人摸象)’을 바탕으로 한다. 원효 스님은 각자의 보고 느끼고 그래서 진실이라 여기는 것의 다름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을 분별하기보다 서로가 모두 연기적으로 인연되어 있음을 먼저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시시비비(是是非非)에 얽혀 서로의 옳음(是)마저 다툼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상대의 그름(非)으로도 실체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적 삶에는 기회와 조건의 불평등으로 인한 불신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차이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실을 좀 더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원효 스님의 말씀을 우리 사회가 함께 마음에 새길 때 ‘옳고(是), 그름(非)’을 걸림돌로 만들지 않고 디딤돌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성진 스님 조계종 군종특별교구 사무총장 sjkr07@gmail.com

 

[1568호 / 2021년 1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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