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사랑 ①
25. 사랑 ①
  • 박희택
  • 승인 2021.01.06 09:30
  • 호수 156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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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를 깨우칠 때 진정한 헌신이 가능

대자는 즐거움 주는 것이며
대비는 괴로움 없애주는 것
깨달음의 내용은 사실 자비
보살이 열반 들지 않는 이유

중도를 마침내 사랑으로 이해한 적명 스님의 중도사랑론은 중도철학에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사랑에 관한 불교적 해석을 촉진한다. 스님은 유고집 ‘수좌 적명’에서 “남이 바로 자기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며, 중도의 깨달음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중도사랑론을 개진하고 있다.

남이 바로 자기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자타동체의 불이(不二),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대비의 깨달음이 중도사랑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자타불이의 관점 위에서,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없애 주는 발고(拔苦)의 대비(大悲)를 사랑으로 등치하면서 깨달음과 연결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스님이 깨달음 내지 중도에 즐거움을 주는 여락(與樂)의 대자(大慈)를 빠뜨리고 있지는 않다.

“깨달음의 내용은 사실 자비입니다. 깨달음은 무아를 본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이고, 나와 남이 진정한 사랑의 관계 속에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무아, 일체 모든 걸 자기로 느꼈을 때 거기에 무슨 미움이 있겠어요? 자기를 사랑하고 일체를 사랑하는 경지, 이를 깨달음의 경지라 하고 무아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무아의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남을 위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내가 있고서는 진정으로 남을 위한 헌신은 불가능합니다.”

위 법문과 같이 적명 스님은 깨달음의 내용인 자비를 사랑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동체대비라 할 때도 이 대비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약어이지, 대자(mahāmaitrī)가 빠진 대비(mahākaruṇā)를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다만 대자대비의 절실함은 고해에 살고 있는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여락보다는 괴로움을 없애 주는 발고를 우선적으로 표현하기에 대비로 줄여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흔히 mahākaruṇā를 대자대비로 번역하기도 하는 것이다.

자비를 여락발고(與樂拔苦)로 명료하게 해설해 주는 대표적인 경전은 용수보살의 ‘대지도론’ 대자대비의(大慈大悲義)이다. 이는 ‘대품반야경’ 초품(初品)을 논석한 전34권 중 제27권에 해당하는데, 그 시작과 더불어 단도직입으로 여락을 대자의 덕성으로, 발고를 대비의 덕성으로 정리하고 있다. 해당 경문을 보기로 한다.

“대자대비라 함은 사무량심 가운데서 이미 분별했지만 이제 다시 간략히 설명해 보기로 한다. 대자는 일체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大慈與一切衆生樂), 대비는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는 것이다(大悲拔一切衆生苦). 대자는 기쁘고 즐거운 인연을 중생에게 주는 것이고(大慈以喜樂因縁與衆生), 대비는 괴로움을 여의는 인연을 중생에게 주는 것이다(大悲以離苦因縁與衆生).”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에 관해서는 ‘대지도론’ 제20권 사무량(四無量)에서 논석하였는데, 여기서도 “자는 중생들을 사랑하여 항상 안온하고 즐거운 일을 구해서 요익하게 해 주는 것이며(慈名愛念衆生 常求安隱樂事以饒益之), 비는 중생들이 오도(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에서 갖가지 몸을 받아서 몸과 마음으로 괴로워함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다(悲名愍念衆生 受五道中種種身苦心苦)”라 하여 같은 맥락으로 풀이하였다.

이렇기에 용수보살은 같은 논에서 “자비는 불도의 근본(慈悲是佛道之根本)”이라고 심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보살은 중생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과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괴로움과 이 세상이나 다음 세상에서 받을 괴로움 등 모든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대자대비를 내어서 이러한 괴로움을 구제해 준다(生大慈悲救如是苦)”고 하여, 역시 괴로움을 없애주는 발고를 우선적으로 표현하면서 자비를 보살의 본분사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기에 “일체 모든 부처님 법 가운데 자비를 크다고 하며(一切諸佛法中慈悲爲大), 만약 대자대비가 없었다면 보살은 일찍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若無大慈大悲 便早入涅槃)”고까지 하고 있다. 이처럼 큰[爲大] 자비를 사랑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568호 / 2021년 1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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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2 2021-01-14 10:06:50
그리고
中道는 사랑일 수 없으며
중도는 有餘 涅槃의 見解를 의미한다.
중생의 有爲의 境界와 解脫의 無爲의 境界가 합성된 경계로서
無爲的 有爲의 합성경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 경계를 중도의 경계라 해야할 것이다.

중도의 경계는 극과 극의 중간을 선택한 견해의 계산된 경계가 아니다.
凡所有相 이 皆是虛妄의 中道的 見解,
卽,
佛性을 의미한다.

위 내용이
이해할 수 없다면 <답글란>에
반론해 주시기 바란디.

합장

거꾸로 2021-01-14 09:14:35
불교란 깨닫기 위함 아니라
궁극은 윤회의 중생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고요한 어둠속을 택한 수행환경은
일체境界를 최소화 하기 위함이요.
수행의 기본坐인 결가부좌의 목적은
육근을 통해 들어오는 6경계를 소멸하여
脫意識의 해탈三昧통해 체득완성을 위해서다.

깨달음이란.
해탈경지 체득을 완성하고 의식으로 되돌아 왔을때,
그완성자에게 자연스레 드러나는 後有의 見解다.
의식으로 되돌아왔으나
해탈경지가 정신에 내재된 상태에서 의식계로 깨어나게 되는데
그 견해가 내재된 해탈경지와 의식의 경계가 합성된 건해
즉 , 유여적 해탈의 견해가 되버린다.

經曰,
有餘 열반의 견해가 되며
그것이 佛性인 것이다.

불교!
자비/중도를 얻기 위한 敎說이 아니다.
해탈체득 후의 유증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