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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③ (1) 삼국통일 과정과 역사적 의의 - 하

신라 삼국통일은 불완전했지만 한민족 생활권 확보는 큰 의미

당은 팽창정책 일환이지만 신라 입장선 생존이 달린 자위 전쟁 
백제 멸망 후 당의 삼국편입정책 노골화…신라와 갈등 불가피
7년 전쟁 끝에 당 몰아내…신라, 한민족의 실질적인 주류 이뤄

사적 제158호.경주 문무대왕릉.문화재청 제공
사적 제158호.경주 문무대왕릉. 문화재청 제공

삼국통일전쟁은 당과 신라가 동맹하여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동맹관계였던 당과 신라 사이에서 백제의 옛 지역을 점유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됨으로서 삼국통일전쟁은 외세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한 전쟁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나당전쟁은 전투의 치열함과 7~8년의 장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점에서 3국간의 항쟁에 못지않은 큰 희생을 치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전쟁은 전기의 삼국항쟁과 후기의 나당전쟁으로 단계를 나누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성장과 한사군의 축출,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등을 계승한 외민족 침략에 대한 대외항쟁의 연장선에서 나당전쟁을 새롭게 평가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삼국통일전쟁은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뒷날의 태종무열왕)와 당태종 사이에 군사동맹협정이 체결된 시점부터 문무왕 16년(676) 당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할 때까지 28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신라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당의 태종과 고종 등 각각 2대에 걸치는 오랜 기간 시종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한 주체가 당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당은 표면적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하려는 군사동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제적인 내면에서는 통일제국 성립 이후 대외적인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삼국통일전쟁에 참여한 것이었지, 결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지원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당의 입장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당과 수직적 관계인 오랑캐(東夷)일 뿐이었으며,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당의 주위에는 3국만이 아니라 서북방향에는 토번(吐藩), 북쪽에는 돌궐(突厥) 등이 강대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당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동방 3국 가운데 특히 고구려가 동북지방을 대표하는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여 거란과 말갈 등을 제압하고 돌궐과 연결될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당은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도 고구려를 제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국력을 기울인 수와 당의 연이은 고구려 침공은 모두 실패하였고, 특히 당태종은 안시성 패배 이후 전면적인 전쟁을 포기하고, 소부대로 빈번하게 침략하여 고구려의 국력을 소모시키려는 장기적인 군사작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 시점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의 김춘추가 당태종을 찾아가서 나당군사동맹을 체결하였던 것인데,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 협정의 주요 내용은 두 나라가 공동으로 군대를 동원하되, 고구려보다 약한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고, 다음에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하는 전략에 합의하고, 또한 백제의 옛 지역은 신라가 영유한다는 조건을 당태종은 양해하였다. 그러나 두 나라의 전쟁의 의도와 목적은 전연 달랐던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당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주변지역으로 지배영역을 확장하려는 침략전쟁이었던 반면, 신라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한 자위전쟁으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신라와 당 사이의 이해관계는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게 되면서 갈등으로 노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당협정에 의해 신라와 당의 공동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켰으나(의자왕 20년, 660), 백제의 옛 땅은 당이 일방적으로 점령하여 웅진도독부를 두어 관할케 하고, 당의 관리와 주둔군이 주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까지도 당의 지배영역으로 삼기 위해 사비를 함락시킨 지 3년 뒤인 문무왕 3년(663)에는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하는 자의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백제 멸망 때에 포로로 데려갔던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귀국케 하고, 계림도독인 신라왕과 회맹(會盟)케 하였다. 당에 머물던 부여융을 귀국케 한 것은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진압하고 유민들의 동요를 무마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를 괴뢰정권으로 삼아 신라를 견제하려는 정책의 소산이었다. 그리하여 당의 칙사 유인원이 입회한 자리에서 부여융의 구백제와 신라로 하여금 화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이것은 신라의 본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라는 “(백제의 부흥군이 점거한) 임존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고, 또 백제인은 간사하여 반복무상하니, 회맹한다 하더라도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고 하면서 회맹 정지를 요구하였지만, 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문무왕 4년(664) 당의 요구대로 신라의 김인문・천존, 그리고 구백제의 부여융・당의 유인원이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체결하였으며, 다시 다음해(665)는 문무왕이 당의 칙사 유인원과 웅진도독 부여융과 더불어 웅진 취리산에서 백마를 희생하여 삽혈동맹(歃血同盟)의 의식을 거행케 하였다. 당의 강요로 이루어진 회맹의 근본 목적은 부여융으로 하여금 당의 보호 아래 백제의 옛 땅을 통치하고 그 유민을 위무하며, 또 신라와 동맹케 함으로써 신라의 백제 옛 땅에 대한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당의 지배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신라로서는 당의 보호 아래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를 견제하려는 정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무왕 11년(671) 당의 장수 설인귀에게 보낸 답서(强首가 지은 것으로 추정)에서 “신라 백성들은 다 본래의 희망을 잃고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의 큰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정황을 보면 따로 한 나라를 자립할 모양이니, 백년 뒤에는 신라의 자손이 반드시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하여 그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런데 당은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를 견제하려고 기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지배세력을 분열시켜 당의 지배력을 신라 내부에까지 침투시키려고 기도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장 소정방은 당 고종의 뜻이라고 하면서, 김유신・김인문・김양도 3인에게 백제의 땅을 식읍으로 나누어주겠다고 제의하였다가 거절당한 바 있으며, 문무왕 5년(665)에는 김유신에게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 식읍 2000호에 봉하고, 이어 다음해에는 김유신의 큰 아들 삼광을 당으로 불러들여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郎將)을 삼고 궁중에서 숙위케 하는 등 김유신 부자를 회유하려고 기도하였다. 신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 옛 땅을 점령해 나가는 한편, 당의 분열정책을 타파하고 내부의 친당인물들을 처단하는 작업을 함께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되기 전에는 공공연히 당에 대항하는 군사적 활동을 자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 침공을 요청하면서 군대 파견과 군량미 조달 등을 통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당은 당태종의 친정 패배 이후 소규모의 군대를 빈번히 파견하여 고구려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는데, 백제가 멸망한 뒤인 보장왕 20년(661) 부터는 당의 수군이 압록강 하구와 평양의 근처에까지 출몰하는 상황이 전개될 정도로 고구려의 전력은 현저히 약화되고 있었다. 거듭되는 전쟁에 의한 전력의 소모와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에 의한 귀족 분열과 민심 이반 등의 요인이 이에 가세하였다. 보장왕 25년(666)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동생 및 아들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쟁탈전은 결정적으로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보장왕 27년(668)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자, 당은 9도독부를 두고, 동시에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고구려만이 아니라 백제와 신라 등을 포함한 동북아 전체를 당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통일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당의 조치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당과 새로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제는 공공연히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백제의 옛 땅을 점유하는 한편,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군을 원조하여 당군의 축출을 기도하였고, 안승의 귀부를 받아들여 고구려왕(뒤의 보덕왕)에 책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백제 지역에 군대를 출동시켜 부여융의 백제군과 당의 주둔군을 각처에서 격파하였다. 문무왕 11년(671) 마침내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이곳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각처에 관인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문무왕 9년(669)부터 본격화된 신라의 군사활동에 대하여 당은 거란과 말갈의 병력까지 동원한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옴으로써 각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문무왕 14년(674) 당은 김인문(문무왕의 동생)을 일방적으로 신라왕으로 임명하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침공케 하였다. 이에 신라는 외교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해명함으로써 당의 조치를 취소케 하는 한편,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통하여 수많은 전투를 벌였는데, 문무왕 15년(675)에는 이근행이 인솔한 20만 대군과의 매초성전을 위시한 한강 유역 일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당군을 대동강 이북으로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다음해(676)에는 설인귀가 이끈 당군과의 금강 하구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마침내 나당전쟁을 마감하였다. 문무왕 16년(676) 당은 결국 안동도호부를 요동성,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김으로써 신라는 평양 이남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게 되었고, 성덕왕 34년(735) 당으로부터 신라 소유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신라는 대체로 대동강부터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남 땅을 점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분명히 불완전한 것이었다. 과거 고구려의 활동 무대에 속하였던 만주와 요동 지역의 광활한 지역을 상실한 것이었다. 옛 고구려 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과 연합하여 발해를 건국하였으나, 고려 태조 9년(926) 거란에 멸망당함으로써 영원히 한국사의 영역에서는 벗어나고 말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삼국통일이 아니라 반도통일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3국 가운데 국가발전이 가장 뒤늦고, 약소했던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으며, 다시 당과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함으로써 신라까지 포함하여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지배권으로 편입시키려던 외세의 침략을 실력으로 물리치고, 한민족의 독자적인 생활권을 확보하였다는 점은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한동안 만주 지역의 발해와 함께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한민족의 형성과 문화의 발전과정에서 실질적인 주류를 이룬 주체가 통일신라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75호 / 2021년 3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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