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⑤ (2) 삼국통일전쟁에 참여한 불교승려 - 하
96.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⑤ (2) 삼국통일전쟁에 참여한 불교승려 - 하
  • 최병헌 교수
  • 승인 2021.03.29 17:02
  • 호수 1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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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참여·메신저 역할·불교 의식으로 국난 극복 동참

신라의 불교교단 조직과 구성 파악은 남은 자료가 많지 않아 한계
통일전쟁기 불교교단 구성과 승려 역할은 광범위하면서 매우 다양
출재가 구분 엄격하지 않고 진골서 노비까지 신분 제약 없이 출가
경주 사천왕사지 항공사진. 문화재청 제공
경주 사천왕사지 항공사진. 문화재청 제공

고구려・백제・신라 3국 중 신라는 국가발전이 가장 늦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공인한 시기도 다른 두 나라에 비해 150여년이나 뒤졌다. 그러나 불교를 공인하면서 왕권강화와 국가발전을 적극 모색하여 이른바 ‘불교왕명시대’를 연출하고, 불교적 신성화를 통한 ‘성골’이라는 신분 개념(실체가 없는 정치적 수사)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은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성직자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선각자로서 고대문화 건설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승려들은 부족의식의 청산과 국가정신의 수립, 새로운 사회윤리의 제시 등 사회적 역할을 주도하였다. 특히 사회윤리 덕목으로 제시된 충(忠)・신(信)・용(勇) 등의 항목은 3국 항쟁과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국가의 존망을 결정케 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청소년의 수련단체인 화랑도는 때로 전쟁에 직접 출전하는 전사집단이 되기도 하였다. 진흥왕대(540~576)에 정비된 화랑도는 ‘미륵하생경’의 신앙에 의하여 결성된 단체로서 집단의 중심인물인 화랑은 미륵의 화생으로 믿어졌으며, 미륵을 믿고 미륵이 수호해 준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쟁에 나아가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청소년들로 구성된 화랑도에는 성인 승려낭도가 속해 있어서 종교적인 자문이나 교육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진지왕대의 진자(眞慈), 진평왕대의 혜숙(惠宿), 진덕여왕대의 전밀(轉密), 효소왕대의 안상(安常), 경덕왕대의 월명(月明), 헌앙왕대의 범교(範敎) 등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신라의 불교교단 통제기구로는 국통(國統)・대도유나(大都唯那)・도유나랑(都唯那娘)・대서성(大書省)・소년서성(少年書省)・주통(州統)・군통(郡統) 등의 승직이 있었는데, ‘삼국사기’ 직관지의 무관(武官) 항목에 부기되어 있는 것을 보아 승직은 군사조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승직 가운데 최고위직인 국통은 사주(寺主)라고도 하는데,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에서 망명해온 혜량(惠亮)이 처음으로 임명되었고, 선덕여왕대에는 자장이 대국통으로 임명되었다. 다음 대도유나와 도유나랑은 국통을 보좌하여 교단의 기강을 바로 잡는 소임으로 비구교단과 비구니교단을 각각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진흥왕대에 설치되고, 진덕여왕대에 1인이 증원되었다. 주통과 군통은 지방통치기구의 정비에 상응하여 설치된 승직이다. 그런데 대서성과 소년서성은 국통 이하의 승직과 달리 교단외적인 승관직으로서 국왕의 교단에 대한 정책자문이나 교단관리를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서성은 처음 진흥왕 11년(550) 안장(安藏)이 임명된 이후 진덕여왕 원년(647)에 1인이 증원되었고, 문무왕 9년(669)에 신혜(信惠), 문무왕 14년(674)에 의안(義安)이 (정관)대서성으로 임명되었던 사실이 전해진다. 이 가운데 특히 의안은 대국통 자장의 생질(누이의 아들)이었던 점이 주목된다. 대서성은 국가발전과 영역확장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진흥왕대에 처음 설치되었고, 이후 김춘추가 집권하여 정치개혁과 통일정책을 추진하던 진덕여왕대에 1인이 증원되었다. 그리고 당나라 군대를 축출하기 위해서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던 문무왕대에 2인이 임명된 사실이 특기되고 있었던 점 등을 보아 국가 비상시의 교단에 대한 특별한 관리정책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승관제도 변천은 자료의 제약이 많아 그 실태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데, 대서성에 정관이라는 호칭이 붙은 것을 보아 불교통제 기관의 성격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대서성의 역할 강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문무왕 4년(664) 8월에 재화(財貨)와 전지(田地)를 함부로 불교 사찰에 희사함을 금하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던 점이다. 신라는 김춘추가 집권하면서 정치와 불교를 구분하여 정치의 윤영은 유교에 의거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에 따라 사찰 소유의 재화와 토지에 제한을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 불교교단의 조직과 구성 내용은 자료 제약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실상을 밝히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공인된 지 100여년이 지난 통일전쟁기에 이르면 불교교단의 구성과 승려의 역할은 실로 광범하고 다양했던 것 같다. 우선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으며, 승려들의 출신 신분과 역할도 다양했던 것으로 본다. 자장(慈藏)과 같이 최고 신분인 진골 출신으로서 국통이 되어 불교교단을 통솔하면서 실추된 왕권의 권위 회복을 위하여 황룡사 9층목탑 같은 상징물을 조성한 승려, 의상(義相)과 같이 근엄 성실한 수행자로서 일관하면서 새로운 중대불교를 개척한 승려, 혜공(惠空)과 같이 노비 출신으로서 길거리에서 대중을 상대로 포교활동에 전념하는 승려, 원효(元曉)와 같이 세속과 출가의 두 사회를 넘나들면서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하는 한편 대중포교 활동을 전개하는 승려, 명랑(明朗)과 같이 신인종이라는 밀교를 전수해 와서 문두루비법으로 당군을 격퇴하는데 기여한 승려, 지의(智義)와 같이 문무왕 측근으로 정치적 자문을 행하던 승려, 임윤(琳潤)과 같이 군대에 소속되어 신라와 당 사이를 왕래하면서 메신저 역할을 하던 승려, 도옥(道玉)과 같이 국가적 위기를 맞아 승복을 벗고 전쟁에 뛰어든 승려, 밀본(密本)과 같이 천재지변 같은 재앙의 퇴치나 질병의 치료 등에 능력을 발휘하던 승려, 광덕(廣德)과 같이 재가생활을 하면서 서방정토 왕생을 염원하던 재가신도 등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부류와 역할을 보여주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불교승려로서의 본분과 그 밖의 불교외적 역할을 구분하여 평가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실재했던 역사적인 사실로써 삼국통일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몇 명의 승려 행적들만을 지적해 보기로 하겠다.

삼국통일 전쟁 시기에 신라가 위기에 처하자 승복을 벗어버리고 전쟁터로 뛰쳐나간 인물로서 우선 도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사량부 출신으로 나마 취복(聚福)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일찍이 출가하여 도옥이라는 이름으로 진흥왕 27년(566) 황룡사가 준공되던 시기에 창건된 실제사에 머물고 있었다. 태종무열왕 2년(655)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뺏기는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에 백제가 조천성(助川城, 충북 영동군 소재 비룡산성)에 쳐들어와 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출전하였으나 결판을 내지 못하였다. 이때 도옥은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승려가 된 자로서 상등은 술업(術業)에 정진하여 본성을 되찾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도의 용(用)을 일으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모습만 승려일 뿐이고 취할만한 한 가지 착한 일도 없으니, 차라리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이 낫겠다” 하였다. 그리고 승복을 벗어 던지고 군복을 입은 다음, 이름을 급히 달려가 무리가 된다는 의미의 취도(驟徒)로 고쳤다. 이에 병부에 나아가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군대를 따라 전선에 나아가 적진에 돌진하여 적군 몇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그 뒤 그의 형 부과(夫果)는 문무왕 11년(671) 백제 부흥군과의 전투에서, 그리고 동생 핍실(逼實)은 신문왕 4년(684) 보덕성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함으로써 모두 사찬의 관등을 추증받았다. 도옥 3형제가 받은 관등으로 보아 6~5두품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진골 출신으로 최고의 승직을 가진 자장과는 구별되는 일반 승도로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불도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전사로서의 용기의 윤리를 우선하던 당시 신라 불자들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반면 창칼을 들고 직접 전투에 참여한 도옥과 다르게 불교신앙을 통해 전쟁의식을 고취하고, 전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주관하여 삼국통일전쟁의 최후 단계인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 인물로는 신인종의 명랑을 들 수 있다. 문무왕 7년(660)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점유하는 과정에서 신라와 당 사이에는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강적인 고구려를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무왕 8년(668)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신라가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여 적극적으로 당의 군대를 축출하려는 의지를 나타내자, 당은 신라에 강력히 항의하고, 신라를 침공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화전양면의 정책을 구사하여 당 조정에 사신을 보내어 해명하는 한편, 군사를 동원하여 대동강 이북으로 당군을 축출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마침내 당 고종은 문무왕 10년(670) 당에 머물고 있던 김인문과 김양도를 구금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왔다. 당에 유학 중이던 의상을 통하여 당의 침공 소식을 접한 문무왕은 자장의 생질인 명랑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천왕사를 세우게 하고, 밀교의 문두루(Mudrā, 神印) 비법으로 외적의 퇴치를 기원하는 법회를 개최하였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에서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밀교 의식을 통하여 국난을 극복하려던 사실을 설화 형태로 전해주고 있다. 사천왕사는 나당전쟁을 종결한 뒤인 문무왕 19년(679)년 준공되었는데, 왕경의 7처가람터 가운데 하나인 낭산의 신유림(神遊林)에 세워졌다. 사천왕사에는 국가에서 관리 보수를 담당하는 성전(成典)이라는 관청이 설치될 정도로 중대에서 가장 중요시한 사찰이 되었으며, 명랑은 신인종의 개조로 추앙되었다.

한편 신라와 당의 군영에는 승려들이 소속되어 활약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신라의 임윤(琳潤)과 당의 법안(法安)을 들 수 있다. 문무왕 11년(671) 나당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신라의 당군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자, 당의 대당총관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왔는데, 그것을 가져온 인물이 바로 신라 승려 임윤이었다. 이 서한을 받은 문무왕은 장문의 답서를 보내어 신라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삼국사기’ 문무왕11년조에 실린 서한 전문을 통해서 나당전쟁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당대의 문장가인 강수가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당의 법안은 문무왕 9년(669) 정월 당 고종의 명령으로 신라에 와서 자석(磁石)을 요구했는데, 신라는 두 상자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법안은 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당의 군영에 계속 머물러 활동하다가 다음해 6월 패강의 남쪽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일으킨 검모잠에게 잡혀 당의 관리와 함께 살해되었다. 승려라는 신분 때문에 대치하고 있는 신라와 당의 군영을 왕래하기에 편리했던 것으로 보이며, 메신저 역할을 통해 갈등을 화해시키는 역할과 함께 때로는 첩보 활동을 하던 인물들은 다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언할 것은 원효와 의상의 삼국통일과정에서의 역할과 국가의식에 관한 문제인데, 이 사실은 그들의 행적과 불교사상을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다른 장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79호 / 2021년 3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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