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하동 쌍계사 금강계단(金剛戒壇)
12. 하동 쌍계사 금강계단(金剛戒壇)
  • ​​​​​​​법상 스님
  • 승인 2021.04.06 10:08
  • 호수 15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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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깨달으면 부처와 중생은 따로 없어

송나라 야도보천 선사가 쓴 게송
분별하는 마음으로 생멸 반복돼
도리 위해선  분별심서 벗어나야
하동 쌍계사 금강계단(金剛戒壇)/글씨 월정 정주상(月汀 鄭周相 1925~2012).
하동 쌍계사 금강계단(金剛戒壇)/글씨 월정 정주상(月汀 鄭周相 1925~2012).

身在海中休覓水 日行嶺上莫尋山
신재해중휴멱수 일행영상막심산 
鶯吟燕語皆相似 莫問前三與後三
앵음연어개상사 막문전삼여후삼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물을 찾지 말고/ 날마다 산 위를 다니면서 산을 찾지 말지어다 /꾀꼬리 울음소리와, 제비의 지저귐이 모두 서로 흡사하니 / 전삼삼과 후삼삼을 묻지 말지어다.)

쌍계사 금강계단의 주련은 송나라 야보도천(冶父道川 1127~1130) 선사가 ‘금강경(金剛經)’을 강해(講解)함에 있어서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대해 쓴 게송이다. 글씨는 월정 정주상 선생이 쓴 것으로 파악된다. 쌍계사 국사암에 있는 선생의 글씨와 같은 필체다. 먼저 ‘금강경’ 여리실견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신으로써 부처님을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육신으로써는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육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육신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부처님을 보느니라.”

이제 주련의 내용을 보자. 신(身)은 곧 자아이다. 직역하면 “내가 바닷물 가운데 있으면서 바닷물을 찾는다”라는 의미로 어리석음을 말한다. 마치 ‘법화경’ 궁자 비유에서 궁자가 아버지를 눈앞에 두고도 아버지를 못 알아보는 것과 같다. 이 몸(자성)이 곧 부처인 줄을 모르고 부처를 찾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본지를 벗어나 바깥으로 눈을 돌려 부처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흔해지면 불교는 그만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영상(嶺上)은 산꼭대기이며 ‘최고’를 뜻한다. 불교에서는 ‘마루’라는 뜻을 가진 종으로 나타낸다. 고로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모르고 ‘부처가 어디에 있지?’하고 헛수고하는 것을 말한다. ‘열반경’에서는 “부처의 성품을 보지 못하는 자를 이름하여 중생”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능가경’에서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하면 곧 여여한 부처”라고 하였다.

부처와 중생은 따로 없음이다. 마음의 실체를 깨달으면 각이라 하여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혜능 선사의 어록 ‘법보단경’ 반야품에 보면 “불법은 세간에 있음이니 세간을 여의지 아니하고 깨닫는 것이다. 세간을 떠나서 보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치 토끼 뿔을 구하는 것과 같음이다”라고 했다. 분별하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인해 생멸이 반복된다. 이 마음이 반연심(攀緣心)이다. 반대로 항상 머무는 참된 마음은 불성, 상주진심이다.

꾀꼬리 울음소리, 제비 울음소리는 무엇을 말함일까? 부처님께서 설하신 숱한 경전이 될 수도 있고 조사가 납자를 제접(提接)하기 위한 선어록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가르침도 분별심으로 본다면 시빗거리만 등장한다. 분별심으로 인하여 중생이 무명을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막문전삼여후삼’ 이 구절은 당나라 무종 때 불교를 박해하는 법난이 저물던 시기 무착문희(無着文喜 821~900) 선사가 오대산으로 순례 가던 길에 날이 저물자 암자에서 유숙하게 되었을 때 문수보살의 화신인 노승을 만난 일화에 나온다. 노승이 선사에게 “그대는 어디서 왔느냐?”라고 묻자 “남방에서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수행하는 대중은 얼마나 되느냐?” 하여 “제법 많다”라고 답했다. 이번에는 무착이 노승에게 “남방불교는 이러할 진데 북방에는 수행하는 사정이 어떠한가?” 하고 묻자 노승이 답하기를 “전삼삼후삼삼”이라고 했다.

전삼삼후삼삼은 격외구(格外句)이다. 상식을 초월한 세계를 말한다. 격외의 도리를 알려면 분별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후대에 공안으로 삼은 것이 ‘전삼삼후삼삼’이다. 대중이 몇 명인가에 대해서 헤아리는 어리석음을 짓는 경계를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1580호 / 2021년 4월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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