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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한국불교언론사

기자명 이창윤

"친일에서 민중불교까지 근현대불교 증언"

皇道불교 선양·불교개혁 등 부침 거듭…80년대 초까지 '잡지 일색'
법보신문 창간 후 주간신문 러시…BBS·btn 개국 언론사 '새 전기'

불교언론은 시대와 민족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남아있어야 할까. 정법매체로서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본지는 창간 11주년을 맞아 근현대불교의 질곡을 지켜보며 후세에 역사의 기록을 남겼던 한국 불교 언론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지면을 마련했다. 근현대 불교언론은 당시 시대와 민족의 염원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영욕과 희비를 담아 우리에게 보여준다. 때로는 곡세아필(曲世阿筆)의 부끄러움도 있었고 절망의 끝자락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띄운 기개 높은 사자후도 있었다. 법보신문은 과거의 불교언론을 교훈삼아 21세기를 당당히 열어나갈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나라 불교언론의 역사는 '일본불교의 앞잡이'라는 오명을 쓰고 출발했다.
경술국치를 당하던 1910년 12월 원종 종무원이 창간한 '원종(圓宗)'이라는 잡지가 한국불교언론의 시초다. 익히 알려져 있는대로 원종은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예속시키려 했던 이회광이 중심이 돼 설립된 종파다. 친일적 논조를 띨 수밖에 없었던 '원종'은 '한국인에 의해 창간된 첫 불교언론매체'라는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일본불교의 앞잡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원종'은 두 차례 나오고는 폐간된다.

'원종'이 창간되기 이전에도 우리 글로 제작된 불교잡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정토종 경성교회가 동양교보사를 설립해 발행한 '동양교보(東洋敎報)'가 그것. 그러나 '동양교보'가 우리 글로 제작됐다고 해서 우리나라 불교언론의 효시로 볼 수는 없다. 편집인 겸 발행인이 일본인 학곡계륭(鶴谷誡隆)이라는 인물인 데다가, 정토종의 교세확장과 일본불교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전파하기 위해 창간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경술국치 이전까지 한국불교계는 독자적인 언론매체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에는 양적인 면에서 그 양상이 달라진다. 경술국치 이후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무렵까지 발행된 불교잡지는 모두 6종.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1912. 2), '해동불보(海東佛報)'(1913.11), '불교진흥회월보'(1915. 3), '조선불교계'(1916. 4), '조선불교총보'(1917. 3), '유심(惟心)'(1918. 9) 등이 시기에 발행된 불교잡지다. 이들 잡지들은 대체적으로 친일적인 불교기관에 의해 발행돼 민족의식이 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불교월보'와 그 맥을 이은 '해동불보'의 발행주체가 원종의 후신인 조선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朝鮮禪敎兩宗各本山住持會議院)이었고, '해동불보'와 '조선불교계'는 대표적인 친일인사인 이회광이 간부로 있던 친일단체 불교진흥회 본부가, '조선불교총보'는 불교진흥회의 후신인 불교옹호회가 각각 발행 주체였다.

이들 잡지에는 "사찰령 때문에 조선불교가 중흥할 수 있다"(조선불교월보)거나 "포교의 방법으로 조선 전래의 방법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본 불교의 '현행미규(現行美規)'를 채용한다"(불교진흥회월보)는 등 반민족적, 반조선불교적 기조가 저변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창간된 '유심'은 다른 잡지와 성격을 달리 한다. 만해한용운 스님이 주도한 유심사에서 발행한 '유심'은 불교계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만든 수양잡지다.

이 '유심'을 기점으로 1919년부터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 군국주의의 마수를 드러낸 1931년까지 발행된 불교계 잡지는 불교혁신과 중흥, 한국전통불교 수호와 같이 불교 개혁이나 불자 계몽의 성격이 강했다.

'취산보림(鷲山寶林)'(1920. 1), '금강저(金剛杵)'(1924. 5), '불일(佛日)'(1924. 7), '불교'(1924. 7), '평범'(1926. 8), '선원(禪苑)'(1931. 3),'불청운동'(1931. 8) 등이 이 시기에 창간된 잡지들이다. 통도사 내에 있던 취산보림사에서 발간한 '취산보림'은 사회와 불교교리와의 상호관계를 통해 불교 발전과 사회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재일불교청년회의 기관지였던'금강저'는 불교 혁신과 중흥을 기하기 위해서, 조선불교회 내 불일사에서 발행한 '불일'은 평등·자비·박애의 이념인 불일의 광명을 찾기 위해서, 선학원에서 발행한 '선원'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하고 선의 대중화를 꾀하기 위해서 각각 발행됐다.

이 시기의 불교잡지는 새로운 언론운동으로서의 전환과 발전, 자유로운 편집과 개성, 독자 확대 등 이전의 불교잡지가 이루어내지 못한 다양한 성과들을 거두었지만 재정과 조직력이 약해 '불교'를 제외하곤 모두 단명하고 말았다.

'불교'는 이 시기에 발행된 다른 잡지와는 차별되는 두 가지 특징을 가졌다. 유일하게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기관지였다는 점과 1933년 종간될 때까지 108호를 내며 장수했다는 점이다. '불교'는 권상로 씨가 편집 겸 발행 책임을 맡았던 83호까지는 정치적 문제는 배제하고 교리 및 신앙에 관한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만해 스님이 편집 겸 발행책임자로 있었던84호 이후부터는 정교분립 주장, 불교행정 비판 등 혁신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이 시기의 다른 불교잡지와 같은 길을 걸었다.

'불교'는 언론매체 경영에 근대적인 기법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불교언론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불교계 동향을 신속하게 보도하기 위해 전국주요사찰과 해외에 통신기자를 두거나 보급을 활성화하기 위해 분사를 설치하고 독자 회원 개념의 사우(社友)를 모집하는 등 보다 선진화된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1932년 이후 해방때까지는 일본 군국주의의 소용돌이 속에 불교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간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녹원'(1933. 8), '불교시보(佛敎時報)'(1935. 8), '금강산'(1935. 9),'적광시보'(1925. 11), '경북불교'(1936. 7) 등이 이 시기에 창간된 잡지다.

이 시기 불교잡지의 가장 큰 특징은 친일논조. 대표적인 예가 김대은이 주관한 불교시보사에서 나온 '불교시보'다. 매월 1회씩 105호까지 나오며장수한 '시보'는 불교계 소식 전달, 종교부활, 정신 작흥(作興), 신앙 고취 등을 목적으로 창간됐다. 하지만 창간때부터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에 동참하는 것을 내세운 점이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황도(皇道)'선전을 목표로 하는 종교보국운동(宗敎報國運動)에 전력한다고 표방한 점, 태평양전쟁 이후 강령을 황도불교선양(皇道佛敎宣揚), 감사보은철저(感謝報恩徹底), 포교보국강화(布敎報國强化) 등으로 내세우는 등 친일논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노골화된 1937년경부터 해방 전까지 새로운 잡지가 창간되지 않은 것도 이 시기 불교잡지의 특징이다.
일제 말기에 침체의 늪에 빠져든 불교언론은 1950년대 말까지 헤어나지 못했다. 일제의 압박에서 풀려나자 우후죽순처럼 각종 매체들이 등장했지만 불교계만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방감으로 인한 안일감, 급격한 사회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불교계 내부 사정, 한국전쟁, 1954년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촉발된 불교분규 등이 그 원인이라는 평가다.

'신생(新生)'(1946. 3), '불교신보'(1946. 5), '불교'(1947. 1), '대중불교'(1947. 1), '불교공론'(1947. 11), '불교공보'(1949. 5), '녹원'(1957.2), '불교세계'(1957. 4), '정토문화'(1958. 6), '현대불교'(1959. 4) 등이 이 시기에 창간된 불교잡지들이다.

1960년대는 한국불교언론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시기다.
이 시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대한불교'의 창간. 조계종이 1960년에 창간한 이 신문은 그때까지만 해도 월간 단위로 이루어지던 발행 간기를 주간 단위로 좁혀 놓았다. '대한불교'는 1월 1일 대판 2면의 월간 신문으로 창간돼 그해 6월 주간으로 바뀐다. 그 뒤 운영권이 개인과 종단을 왔다갔다 하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1980년 정부의 언론 통폐합 사태와 10·27법난의 여파로 11월 30일 정기간행물 등록이 취소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대한불교'는 그해 12월 '불교신문'으로 새롭게 태어나 지령을 이어간다.

1965년에 창간된 '법시(法施)'와 1968년에 창간된 '법륜(法輪)'은 불교잡지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두 잡지는 불교잡지 불모지나 다름없던 당시에 불교종합잡지로서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뿐 아니라 재가불자들의 원력과 신심으로 잡지가 발행되고 포교사업이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 두 잡지의 뒤를 이어 '백련'(1966), '불교문화'(1967. 9), '불교'(1970. 7), '불광'(1974. 7), '여성불교'(1979. 5) 등 불자들의 귀에 익은 불교잡지들이 줄줄이 창간돼 1980년대 전반의 '불교잡지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1980년대는 크고 작은 잡지들이 명멸하며 기존의 불교잡지와는 다른 시도들을 했던 시기이다.

조계종 총무원이 창간한 '불교사상'(1983. 12)이나 '우리의 숨결, 불교를 알자'를 기치로 천태종이 창간한 '금강'(1985. 1), '대중불교시대를 펼치는 운동지'로 창간된 '대원(대중불교)', '한국불교의 새 지평을 여는 포교사전문지'를 표방하며 창간된 '월간 법회'(1984), '올바른 인식과 실천을 위한 불교시사지'를 내세우며 창간된 '숲과 나무', 현대여성의 불교지 '하늘 개인 날' 등이 이 시기에 창간됐던 대표적인 잡지들이다.

이들 잡지는 과감한 투자와 참신한 기획, 볼륨감있는 모양(불교사상, 금강)이나 설법초안 마련, 민중불교운동의 수용 등 진보적 성향(설법), 필진에 대한 문호개방, 대사회문제에 대한 접근(숲과 나무) 등 새로운 시도와 다양한 내용으로 고정된 필진, 구태의연한 기획에 안주해 있던 불교잡지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한편 '불교회보'(현 주간불교신문, 1982. 4)는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이 유일한 교계 신문매체였던 시기에 창간돼 조계종단에 대한 감시자이자 초종단 범불교계 신문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 말 이후는 주간신문의 잇따른 창간과 사보 및 새로운 월간 잡지들의 등장, 불교방송과 불교텔레비전의 개국 등이 겹친 불교언론의 전성기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신문매체의 선두주자는 '법보신문'(1988. 5). 불국사가 창간한'법보신문'은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과는 다른 논조를 유지하는 등 차별화된 전략으로 교계의 유력한 언론매체로 급부상했다. '법보신문'은 1990년 1월 전면가로쓰기 편집체제로 전환, 불교계 신문들의 가로쓰기 및 한글전용화를 선도해 갔다.

'법보신문'의 뒤를 이어 '한국불교'(1988. 11), '해동불교'(1989. 3),'법무교화신문'(현 시대불교, 1989. 12), '대한불교'(1990. 4), '현대불교신문'(1994. 10) 등 신문매체가 잇따라 창간됐다.

잡지로는 어린이 잡지인 '굴렁쇠 어린이(동쪽나라)'(1990. 1)와 종합불교시사정보지 '다보'(1992. 3)가 특기할 만하다.

이 시기의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은 방송매체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방송이 1990년 5월 개국한 데 이어 불교텔레비전이 1995년 3월 개국함으로써 불교언론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기존의 언론매체가 주간이나 월간 단위로 소식을 전함으로써 속보성을 담보해 낼 수 없었던 데 비해 이들 매체는 각종 교계 소식을 그때 그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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