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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정론-종교는 아편인가

기자명 정병조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텔레비젼 화면에 비친 영생교의 집회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무릎을꿇고 양손을 두들기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섬뜩이는 광기를 느낀다. 더군다나 승려복장을 차려입은 이들까지 등장하는데는 분노마저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마력이 이들을 이지경까지 몰고 갔는가.

종교적 광신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종교적 가치의 절대화가 원인이다. 자신만을 절대화시킬때, 상대방은 언제나 부수적 일수밖에 없다. 절대신념체계는 유일신을 신봉하는 종교들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음으로는 종교가치를 현실화 시킬때 나타날수 있다. 사실 예수나 석가, 공자등의 가르침에는 형이상학적 색채가 농후하다. 영혼의 문제라든지 업과 윤회에 대한 교설은 다분히 철학성이 짙다. 그러나 대중들은 단적이고 현실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당장 가난을 면하고 싶고, 대학에 붙고 싶다. 그 희구들에 대해 종교는 어떠한 형태로든 `응답'하지 않을수 없다. 이때 철학적 교리는 주술의 탈을 쓰게 되고 대중들은 열광하게 된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점이 신자들의 이기적 기복심리이다. 저 혼자 잘먹고 잘 살려는 이기심을 종교에 투영하는 것이다. 이들을 광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진한 서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서라도 지구가 멸망하고, 자신들만은 살아 남으려는 생각이 남기 때문이다. 광신을 예방하는 유일한 길은 종교적 가치의 상대적 수용과 함께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하는 방법뿐이다. 바로 이점에 기성종교의 맹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인기에 편승하기 보다는 의연히 제자리를 지키려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학대받아온 민중의 탄식" "눈물의 후광" 등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프로이드나 에릭프롬같은 정신분석학자들도 결코 종교에 대해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종교인을"세척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운명론자"로 몰아 세운다.

물론 우리는 이들의 주장이 부당주연의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안다. 대다수의 선량한 종교인들이 얼마나 선량한 삶을 누리려고 고생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이들의 독설속에 담긴 몇몇 진실성도 솔직히 시인해야 할 줄 안다.우선 종교가 지닌 종말신앙의 문제점이다. 지금도 인류와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는 끔찍한 메시지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들은 천지개벽을 강조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무력화시켜 버린다.

물론 파라다이스에 대한 희구심리는보편적이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만을 꿈꿀때 인간은 몽상가로 전락하고 만다.

<유마경>에서 가르치신대로 "마음이 맑으면 부처님 땅이 맑아지는 "불이의 사상적 토대가 아쉽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종교인들의 위선이다.입으로는 진리를 되뇌이면서 행동은 전혀 딴판이다. 겸손의 미소를 읽지 않지만, 내면세계는 삼독심으로 얼룩져 있다. 이 양면성은 반드시 노출되게마련이다.

특히 종교인의 부는 경계해야 한다. 목회자나 스님네들의 생명은 결코 재물이나 번쩍이는 예배당일 수 없다. 청빈과 검약이야말로 종교성직자들의 생명이다. 그것이 무너질때 종교집단은 권위로 포장한 세속의 무뢰배들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불교의 관성설은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되야 한다. 우리는 이 불교적 가치를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해석해 왔다. 유치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진짜 비극적 장면에는 눈물이 없다. 어설프게 슬플때는 눈물을 흘리지만, 기막힌슬픔에는 눈물마저 고갈된다. 너그러움이란 달관의 표현이다. 모든 것을 안아드리는 포용성, 용서하고 용납하는 대비의 마음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상대적 차별성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이다.
불교의 관용은 그와같은 변증법적 과정을 겪고 나서 이루어진다.

지금 우리는 이 위대한 불교정신을 현전화 시켜야 할 때이다. 불행하게 오늘의 불교는 자꾸 외형적인 성장에만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한다.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자신을 억누를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다운 승리자"라고 하셨다. 내면의 완성을 추구하는 불교,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려는 겸손한 마음씨의 불교인이 되어야 한다.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할 종교가 저만의 진리성을 내세우면서 또다시 영생의 이기주의로 빠져들고 있다.

이제 불교는 그 불행한 종교들을 향해서도 자비로워야 할 때이다.


정 병 조<동국대 교수.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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