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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경봉 대선사 상

기자명 이학종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智慧의 칼로 佛祖를 침묵시킨 대선지식

'중생은 미완의 如來' 초인적 수행으로 입증
"마음 밖에서 주인공 찾지 말라" 後學에 강조

한 납자가 해인사 장경각 뒤켠 가야산 초입에 쪼그리고 앉아 슬피 눈물을 흘렸다. "전생이 업장이 얼마나 두텁기에 앉으면 졸고, 혹 졸지 않으면 망상이 끝없이 일어나는가?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억울하구나 … ." 잠시 후 납자는 가만히 일어나 장경각 뒤쪽에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가야산으로 올랐다. 인적이 없는 산중턱에 이르자 납자는 돌연 '으아아아∼' 통곡을 했다. '아아악∼' 발광하듯 벽력같은 고함을 쳐보아도 가슴이 답답하기는 여전했다. 납자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골똘한 표정이었지만, 번뇌를 한아름 머금은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래, 얼음을 물고 정진을 해보자. 그래도 안되면 벽이나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든지 … ." 납자는 굳게 결심을 했다. 얼마 후 납자의 치아상태가 엉망이 돼버렸음은 물론이다.
경봉(鏡峰), 훗날 한국 선종(禪宗)의 큰 봉우리로 우뚝 선 그의 견성을 향한 정진은 이렇듯 치열했다.

경봉은 수행을 함에 있어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인생의 4대 의혹', 즉 '자기가 자기를 모르니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누구인가?' '뚜렷이 밝고 지극히 신령한 이 마음자리가 어디에 있다가 부모의 태중(胎中)으로 들어간 것인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죽는 날은 언제인가?'의 네 가지를 늘 천착했다. 다른 세 가지는 아니더라도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참된 주인공은 반드시 알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면서도 정작 밥 먹는 놈을 모르고 있으니 … . 걷고 듣고 보고 소리 질러도 그렇게 하는 진짜 주인을 알 수 없으니 가슴이 답답하구나."번민을 거듭하던 경봉은 어느 날 굳게 결심을 했다. "한 세상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참된 주인공을 찾을 때까지 목숨을 걸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보리라. 그리 하다가 죽으면 또 어떠리."

별 수단을 다 동원해도 졸음이 사라지지 않을 때면 경봉은 아무도 없는 뒷산으로 올라가 목놓아 울곤 했다. 자기 극복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흘리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면 마치 묵은 업장이 녹아 내리고 공부가 잘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해인사 퇴설당에서 공부의 틀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된 경봉은 '사찰 소임을 맡기 위해 빨리 돌아 오라'는 통도사로부터의 전갈을 외면하고 황악산 직지사로 향했다. 경봉은 직지사에 이르러 비로소 참 공부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예서 이루어진 만봉 화상과의 만남이 경봉의 일생에 일대 전기를 준 것이었다.

"허, 보기 드문 법기(法器)로세." 한 눈에 경봉의 그릇을 알아본 만봉 화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손수 걸망을 받아들고 방을 잡아준 후 새 옷을 내어주고 헌옷을 빨아 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어느 날 화상은 경봉을 데리고 황악산 태봉(胎峰)으로 올라가 홀어머니와 승려가 된 외동아들이 함께 도를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경전공부와 범패와 같은 의식 공부도 중요하지만 대도(大道)를 이뤄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참선뿐이라는 가르침이 담긴 도담(道談)이었다. 이때 만봉이 들려준 이야기가 훗날 경봉이라는 대선지식을 낳은 계기가 되었으니 만봉과 경봉의 만남은 말 그대로 줄탁( 啄)의 인연이라 할 것이었다. 직지사에 주석하고 있던 남전(南泉) 선사의 지도를 받으며 한 철을 난 후 경봉은 당시 우리나라 제1의 선원으로 손꼽히던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함경도 석왕사의 내원선원으로 옮겨 화두에 몰입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정진을 거듭하면서 그토록 제압되지 않던 망상과 졸음이 차츰 기세를 꺾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조급증은 사라져갔다. 마음이 차분해지며 공부에 큰 진전이 있었다.

공부가 차츰 순일(純一)하게 이루어지면서 경봉은 다시 통도사로 돌아왔다. 은사 성해 스님을 찾아 큰절을 올린 그는 공부를 하겠다며 허락 없이 통도사를 떠난 것과 돌아오라는 명령을 어긴 데 대한 벌을 청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은사는 한마디의 꾸중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안양암(安養庵)으로 데려가 "네가 그토록 원하던 수행을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말고 실컷 해보라"며 추상과 같은 금족령을 내렸다. 표정은 무서울 만큼 굳어있었지만 제자에 대한 은사의 사랑이 이보다 더 지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은사의 지극한 배려로 경봉은 이 때 비로소 생애 최고의 수행을 경험할 수 있었다. 밥 먹는 시간외에는 오로지 참선뿐이었다. 망상과 수마를 물리치기 위해 밤낮을 잊은 듯 좌선을 풀지 않았다. 망상이 만들어낸 가시 숲을 지나 깨달음마저도 훌훌 털어 버린(透荊棘林) 경지가 차츰 다가왔다. 그토록 그를 괴롭히던 망상과 혼침은 시뻘겋게 달아진 화롯불 위로 던져진 눈덩이 마냥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안양암에서의 수행을 통해 경봉은 비로소 불퇴전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정진을 거듭하면서도 경봉은 직접 설주(說主)가 되어 해담화상과 함께 화엄산림법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화엄법회 입제 날부터 화두가 뚜렷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매일여(寤寐一如), 화엄산림을 개설하면서 이미 그에게는 밤낮의 구분이 사라졌다. 한 닷새쯤 흘렀을까. 갑자기 벽이 무너진 듯 시야가 넓게 트이더니 일원상(一圓相)이 오롯이 나타났다. 내남(自他), 주객관이 모두 무너진 경계가 하나의 둥근 원으로 표출된 것이다. 찰나, 불이(不二)의 경지를 맛본 경봉은 한 수의 게송을 읊었으니, 때는 1927년 겨울이었다.

천지를 삼키니 큰 기틀이로다.
돌 토끼 학을 타고 진흙 거북 좇아가네.
꽃숲엔 새가 자고 강산은 고요한데
칡덩쿨 달과 솔바람 뉘라서 완상하리.
天地口呑是上機
石兎乘鶴遂泥龜
花林鳥宿江山靜
蘿月松風弄阿誰

그러나, 좋은 경지를 맛보긴 했지만 왠지 막막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뭣고의 화두는 여전히 의심의 덩어리가 되어 캄캄한 절벽으로 남아 있질 않은가. 경봉은 다시 좌정을 하여 화두삼매에 빠져들었다. 확철대오(確徹大悟)를 하기 전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위법망구의 결의가 그의 얼굴에 가득 피어올랐다. 그리고 1주일 … , 아니 열흘쯤 흘렀을까. 새벽 두 시 반경 바람도 잠이 든 듯 잦아든 시각에 갑자기 '파바바박' 하며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 그 순간경봉은 문득 세상이 열림을 맛보았으니 비로소 개안(開眼)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경봉은 무릎을 치고 일어나 얼씨구나 어깨춤을 추었다. 창호지로 바른 문짝을 찢어질 만큼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해인사 뒷산에 올라 통곡을 하며 수마와 싸우던 기억, 직지사와 금강산, 그리고 통도사 안양암에서 피나는 정진을 하며 그토록 이르고 싶었던 자성의 자리가 확연히 눈앞에 나타나 있질 않은가.' 깨달음의 열락(悅樂)을 만끽한 경봉은 그 솟구치는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화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
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見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

경봉의 깨침은 여느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의문에 가득 찬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벼랑 끝까지 몰고 간 끝에 생생하게 확인한 체험견성, 그의 견성은 자기를 관념적으로 확인하는데 그친 것이 아닌, 한 점 의혹도 남아있지 않은 깨달음이었으니 마침내 조사선의(祖師禪義)를 체득한 것이었다.

화두 하나만 붙잡고 치열한 선정삼매에 드는 선승들과는 달리 경봉은 참선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되 경전공부와 염불, 또 선승들이 기피하는 주지직과 포교사의 역할까지 기꺼이 맡았던 대승보살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위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上求菩提 下化衆生) 모범적인 삶의 궤적을 보여준 것이다.

확철대오를 이룬 후 경봉은 마음 속에 있는 또 하나의 경봉, 즉 진짜 주인공과 수시로 문답시(問答詩) 형식의 태평가를 부르며 깨달음의 경지를 거듭거듭 확인하는데 추호의 게으름이 없었다.

쯧쯧 무정한 나의 주인공아
이제사 만나다니 어찌 이리 늦었노?
하하 우습다 내가 그대 집 속에 있었건만
그대 눈이 밝지 못해 늦었을 뿐이네.
이처럼 경봉은 단순히 주인공을 깨달아 아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주인공과 하나가 되어 마음대로 활용하는 경지를 만끽했다. 그의 태평가는 그대로가 자유롭고 걸림없는 도인의 노래였다.

모든 번뇌의 적을 물리치고 주인공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걸림 없이 사는 도인의 경지, 그가 경영한 90여 년의 생애는 무애의 경지를 노니는 불보살의 삶에다름 아니었다.
세수 91세 되던 해(1982년 7월), 경봉이 미질(微疾)을 보이자 문도들이 모여들었다. 입적이 가까웠음을 느낀 효행상좌 명정이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 스님 가신 뒤에도 스님을 뵙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주위를 둘러보던 경봉은 잠시 침묵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 그날 새벽 경봉은 마치 옷을 갈아입듯이 이승의 인연을 접었다.

경봉의 법구를 다비장에 안치하고 점화를 한 후 1시간 여쯤 되었을까. 갑자기 영축산에 시커먼 먹구름이 일더니 일진광풍이 휘몰아치면서 뇌성벽력과 함께 양동이로 물을 쏟아 붓듯 폭우가 내렸다. 다비를 지켜보던 수십만의 조문객들은 옷젖는 줄도 모른 채 '큰스님의 뜻이 내린다'며 경외의 탄성을 금치 못했다.
경봉은 입적 14년 전(1966년), 후학들이 자신의 수의를 짓던 날, 이미 일지(日誌)를 통해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한편의 글을 남겼으니, 그것이 곧 열반게였다.

옛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古佛也恁ㅉ去
今佛也恁ㅉ去
來耶去耶
靑山立流水去
何者非何者 ㅉ
夜半三更見燭舞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연보

1982년 4월 9일 경남 밀양에서 김영규 안동권씨를 부모로 출생
1906년 모친상을 당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한 후 법을 찾고자 결심
1907년 6월 9일 통도사에서 성해화상을 은사로 득도
1911년 해담화상으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 수지
1915년 전국 여러 선원을 돌며 수선 1925년 통도사 양로만일염불회 창설
1927년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화엄산림법회를 하던 중 12월 13일 개오
1982년 7월 17일 세수 91, 법랍 75세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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