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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찰 설화와 전설-문수보살 도움으로 선 미륵 논산 관촉사

기자명 임연태
  • 동정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우뚝 선 미륵님 세상 밝히네

혜명(慧明)의 발길은 오늘도 무거웠다. 석양을 등에 지고 절로 돌아가는 혜명의 발길이 무거운 것은 아무리 궁리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30여년간 거대한 미륵불상을 조성했다. 세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로 조성한 미륵님을 어떻게 세워 모시느냐 하는 문제가 혜명의 온 몸을 짓누르는 화두였다.

멀리 절이 눈에 들어 오는 아름다운 강둑길을 따라 걷던 혜명은 잠시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혈기 충천하는 젊은 수행자였던 금강산 시절. 그는 조정에서 보낸 사람으로부터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다.

" 스님. 논산 땅에 반야산이 있는데 그 산에서 신기한 일이 일어 났습니다. 한아낙이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올랐는데 어디선가 어린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그 소리를 따라 가 보니 아기는 없고 땅에서 커다란 바위가 솟아 올랐다지 뭡니까. 놀란 아낙이 집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말했고 동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올라가 보니 과연 산중턱에 전에는 없었던 바위가 솟아나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는군요. 관아에서 그 사실을 알고 조정으로 소식을 전했는데 전하께서 신하들과 이 신비로운 일을 논의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므로 그 바위로 백성을 편안케 할 부처님을 조성토록 하라는어명이 내려졌고 그 책임을 스님께서 맡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혜명은 그 큰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나 그 신기한 바위도 보고 싶었고 어명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며칠을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제불보살님, 그 불사를 다 마칠 때가지 저를 보살펴 주시옵소서 …"
혜명은 반야산에 당도해서도 땅에서 솟았다는 바위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혜명의 눈에도 그 바위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 바위 앞에 초막을 짓고 기도를 하는혜명의 마음은 맑고 청정했다. 티끌만한 번뇌도 잡스런 생각도 끼어 들 틈이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혜명은 '이 바위는 미륵보살님을 조성해 백성들이 의지하고 국운이 융창토록 할 바위가 틀림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조정의 도움이 각별했으므로 불사를 시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석공이 1백명이나 되었으니 땅에서 솟은 바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불상조성불사는 온 나라의 얘기거리가 되기도 했다. "백성들의 염원이 모아져 비로소 미륵님이 화현하실 것이니 …" 혜명은 이 불사에 마음을 쏟고 말을 전하고 원만회향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보살님의 가피가 충만하길 빌고 또 빌었다. 전국에서 모여 든 석공들과 인부들은 땅에서 솟은 바위로만 미륵님을 조성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혜명의 생각은 달랐다.

"이 바위로는 미륵님 상반신을 조성합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얼마나 큰 불상을 만들자는 겁니까"
어리둥절해 하는 석공 몇을 데리고 이웃 연산 마을 여기저기를 다니던 혜명 스님은 커다란 바위 하나를 가리키며 "저 바위를 옮겨다 부처님 하반신을 만듭시다"라 말했다. 일천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어 반야산으로 옮겨 온 바위는 신기하게도 땅에서 솟은 바위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불사는 시작됐다. 상반신과 하반신 그리고 창천을 떠흐르는 구름 모양의 머리에 얹을 이중의 보관. 석공들은 혜명의 지시에 따라 부지런히 일했다. 돌을 쪼고 망치질을 하는 소리가 반야산에서 하루도 그치는 날이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흘러 30년이 넘고 또 몇해가 흘렀다. 미륵님의 몸이 서서히 자태를 들어내며 구경을 오는 사람도 많았다. 대작불사에 시주하여 공덕을 비는 사람들을 위한 혜명의 기도도 그침이 없었다.

이제 미륵님의 보관과 상 하반신을 세우는 일만 남았는데 혜명은 거대한 바위를 포개어 세우는 방법을 알 길이 없었다. 석공들도 "어떻게 이 미륵님을 세웁니까"라며 혜명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감했다. 그러나 미륵님에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그 문제도 풀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 좋은 방법이 없을까.
감았던 눈을 뜨고 강둑길을 걷던 스님은 모래 밭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날이 저무는데 왠 아이들이 저기서 놀고 있을까."
스님은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려는 생각에 강가로 내려갔다. 그런데 혜명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아니, 저것은 …"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불상을 만들어 세우는 놀이였다. 진흙으로 부처님을 만들었는데 상반신과 하반신을 나눈 것이 스님이 조성중인 미륵님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든 스님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 보았다.

아이들은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의 하반신을 먼저 세우고 그 주위에 모래를 쌓았다. 하반신이 거의 묻히도록 모래를 덮고 그 위로 상반신을 굴려다가 하반신과 맞추더니 쌓았던 모래를 다 쓸어 내니 온전하게 서 있는 부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 저것이다."
더 이상 그곳에 지체할 겨를도 없이 혜명은 절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인부들을 불러 방금 전에 아이들에게서 배운 방법을 설명했다. 모두들 입을 벌리고 무릎을 치며 "그런 방법을 어떻게 생각해 내셨습니까. 과연 스님은 보통 스님이 아니십니다" 저마다 찬사를 하는 동안 스님은 그 아이들이 생각나 다시 강가로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흔적도 없고 그들이 놀던 자리에 진흙불상도 없었다. 평온한 강가에 어둠이 내려 앉고 있었다.

"내 기도에 미륵님이 감응하신 것이야. 문수보살님과 보현보살님이 아이들로 나투셔서 나를 일깨우고 가셨음이야. 이렇게 크고 기쁜 가피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
혜명은 흙을 쌓는 방법으로 미륵님을 세웠다. 흙을 걷어 내고 나니 반야산 중턱에 웅장하고 장엄한 미륵님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인부들과 구경 온 사람들이 환호하며 무수히 절을 했다. 그 순간 또 한번의 놀랄 일이 벌어졌다. 하늘에서비가 내려 미륵님의 몸에 묻은 흙을 말끔히 씻어 내는 것이었다. 놀랄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미륵님의 몸에서는 상서로운 빛이 났고 미간 옥호에서는 찬란한 빛이 나와 온 산하를 뒤덮었다.


임연태 기자


■관촉사의 역사

충남 논산군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에 자리잡은 관촉사(灌燭寺)는 고려광종 19년 (968) 혜명이 창건했다. 목종 9년(1006)까지 조성한 석조미륵보살 입상으로 유명하다. 미륵보살 입상의 신장은 18.12미터이며 둘레는 9.9미터에 이른다. 귀의 길미만도 1.8미터이며 갓의 높이는 2.43미터다. 자연 화강암석 암반위에 조성됐다.

석조미륵보살 입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등은 높이 4.45미터의 크기이며 보물 제232호로 지정돼 있다. 이 밖에도 충청남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배례석(제53호)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석문(제79호)과 5층석탑 사적비 등이 있다.

혜명의 창건 이후 1386년에 법당이 신축됐으며 1581년에는 백지(白只)라는 거사가 중수했다. 1674년에 지능(智能) 스님이 1735년에 성능(性能) 스님이 각각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촉사의 처음 이름은 관촉사(觀燭寺)라 했다. 미륵보살상이 조성되어 몸체와 미간 옥호에서 나오는 빛이 중국에까지 이르러 이를 본 고승 지안(智眼)이 찾아와 "미륵님의 빛나는 몸을 보는 것이 마치 촛불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었다. 후에 관자의 한자를 바꾼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관촉사의 미륵보살입상 조성과 관련한 설화는 조선후기의 문신 권륜(權倫)이 영조19년(1743)에 기록한 〈관촉사사적〉에 전해지고 있다.

■ 스님으로 화현해 나라구한 흔적-보관의 모서리 떨어진 사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입상(보물 제218호 일명 은진미륵)은 이중의 보관으로 머리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래쪽 보관의 한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것을 이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사연은 이렇다.

미륵보살상이 조성된 뒤 어느해 북방의 오랑캐들이 쳐들어 왔다. 외적들이 압록강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고려쪽에서 한 스님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을 건너오는 것이었다. 얕은 냇물을 건너듯 간단히 강을 건너오는 삿갓 쓴 스님을 본 침략군의 장수는 "저 중이 건너는 곳은 물이 얕으니 그리 건너라"고 명령했고 군사들은 일제히 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강물은 깊었고 성급히 뛰어든 군사들은 익사하고 말았다.

절반 이상의 부하를 잃은 장수는 화가 치밀어 "여봐라, 그 못된 중을 잡아라"고 소리쳤다. 적의 장수는 잡혀 온 스님을 향해 긴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칼은 스님의 몸에 맞지 않고 삿갓 귀퉁이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 스님도 그림자였던 듯이 사라져 버렸다. 놀란 침략군들은 "고려에는 쳐들어 갈 수 없다."며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려 되돌아 가 버렸다.

그런데 변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반야산 미륵부처님의 온 몸에서는 땀이 흘러 내리고 손에 들고 있는 연꽃은 희미하게 빛을 잃고 보관의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은 반야산 미륵님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변방 압록강에 스님의 모습으로 화현했던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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