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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정론-'깜짝쇼'가 문화정책인가

기자명 이선복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3.1절 아침의 철거 고유제와 더불어 드디어 본격적으로 철거되려나 보다. 짐짓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척 하기도 했던 일부 언론들이 건물철거선포식에 즈음해서는 전혀 아무 소리가 없었던 것을 보니, 이번에도 역시 정치권의 풍향을 재빨리 눈치채고 적응해온 우리나라 언론사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기민하게 처신한 듯 하다.

어느 사람의 말마따나 소위 문민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 문화정책은 가히 때려 부수기의 연속이라고 할 만하다. 천수백억의 막대한 돈이 아깝지도 않은지, 건물수명이 다할 때까지를 참지 못해 하루 아침에 날려보내는 광경을 TV로 생중계한 일이야말로 이 정권의 문화정책의 수준과 안목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었던 듯하다.

구 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논의하며 청와대와 문체부 관리들은 폭파철거를 진지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왕국을 복원하기 위해 건물을 철거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이들이 폭파철거를 검토했다는 사실은 이 건물의 철거 역시 진지한 역사의식과 문화의식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순간의 인기를 위한 깜짝쇼 수준에서 내려진 것임을 말해 준다.

하긴 황금알을 낳는 거위 정도로 인식되는 경마장을 새로 짓는 문제에 대해, 소위 TK정서를 감안해 경주에 지으라는 지시를 대통령이 내리는 게 우리의 문화현실이다. 학계에서 반대하고 실무부서에서도 불가하다는 보고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권력의 실세라는 해당 부서 차관은 전혀 그런 얘기를 들은 바 없다고 천역덕스럽게 말하는게 문민정권의 면면이자 문화정책 책임자의 자세이다.

총독부건물 철거도 이런 수준의 후안무치한 거짓말의 연속으로 `작전'이 수행되었다. 건물철거계획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폭파철거안까지도 소위 여론 탐색용으로 유포하는 한편으로는 청와대수석비서관이나 장차관들이 전혀 그런 계획이 없다는 오리발 언론플레이를 펼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박물관의 실무자들에게는 건물철거 및 박물관 이전안을 만들라는 지시를 기록에 남을세라 문서 아닌 구두로 내리며 착착 작전을 진행시켰다. 이런 식의 정책수립과 집행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볼 수 없던 강압적이며 오만한 방식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건물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집어 넣기로 한 결정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아무튼 이 건물을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이상 박물관 수장품의 안전에 대한 만반의 대책이 갖추어지지 않은 채, 건물을 철거한다는 것은 그 무슨 그럴 듯한 명분이 있더라도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주장을 펴는 자들이야말로 `진짜 친일파'라 욕 먹어 쌀것이다.

긴긴 세월의 풍상을 겪은 문화유산의 관리란 보통 일이 아니다. 박물관입지 선정과 설계를 금년 말까지 해치우겠다는 정부계획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세계신기록감이다. 또, 건물을 완공하고 난 다음에도 여러 해 동안 빈채로 놔두고 공기를 순환시켜 시멘트 독을 제거해야 하는 일과도 같은 세심한 준비작업이 필요하지만, 완공과 동시에 유물을 옮기겠다는 게 현재의 계획이다.

게다가 새 박물관 터로 잡힌 용산가족공원은 여름철 하수도 역류로 인한 상습침수지이다. 자리보전에 연연하고 있는 박물관장께서야 유물은 일부러 습한 곳에 두기도 하는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궤변을 늘어 놓고 있지만, 모르긴 해도 정권이 바뀌면 그때야 할 수 없어서 그런 말을 했노라는 소리를 할 게 뻔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전문적인 지식이라곤 쥐뿔 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유물보존에 아무 문제가 없음을 강변해 온 일인데, 10년쯤 세월이 지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사람들은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여간 이제 물은 엎질러진 만큼, 앞으로 그 물을 조금이라도 퍼담을 책임을 맡은 사람들만 큰 골치거리를 만난 셈이다.

구 총독부 건물 철거에 대한 소감을 한 마디만 더하자. 건물철거 이후의 경복궁 모습을 그린 TV화면에는 총독부 건물이 사라진 `시원한 모습'만이 보이는데, 이 화면이야말로 이 기막힌 연극의 본질을 잘 말해주는 듯하다. 경복궁에서는 총독부 건물 철거만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서쪽으로 총독부 건물과 비슷한 크기의 흉칙한 콘크리트덩어리가 들어서고 있다. 이 흉물은 앞으로 두고두고 서울의 새로운 명소, 즉 우리 시대의 조급함과 졸속함의 웅변적 기념물로 남게 될 듯하다.


이 선 복-서울대 고고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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