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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쓴 경전

기자명 김형규

송광사 박물관 국내 유일 血經 보유

혀에서 피 빼 사경… 위법망구 극한적 표현

“경(經)을 이룬 방법은 사경 종이를 만들기 위한 닥나무는 뿌리에 향수를 뿌려 생장시키고, 그 뒤에 닥나무 껍질을 벗기거나, 껍질을 다듬거나, 종이를 만들거나 경문을 쓰거나, 경심(經心)을 만들거나, 불·보살상을 그리거나, 심부름하는 사람 모두에게 보살계를 주고, 먹는 것을 삼가게 하며, 혹 대소변을 보거나, 누워 자거나, 혹 먹고 마시거나 하면 향수를 써서 목욕시켜야만 만드는 곳에 나아갔다.…(중략) 여러 필사들은 각기 향화(香花)를 받들고 마음을 공경히 하여 경을 만드는 곳에 이르면 삼귀의(三歸依)하고 세 번 정례하고, 불·보살·화엄경을 공양한 이후에 자리에 올라 경을 썼다…(중략)”

전남 구례 화엄사를 창건했던 연기 조사가 755년(신라 경덕왕 14년)에 작성한 신라화엄경사경발원문(新羅華嚴經寫經跋文)의 내용이다. 옛 사람들은 사경을 어떻게 생각했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경 종이에 쓰이는 나무는 자랄 때부터 향수를 뿌려 키우고, 사경에 관계된 이들이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고 나면 반드시 향수를 써서 목욕을 해야 했다”는 내용에서 사경이 단순히 경전을 베끼는 행위가 아니라, 법을 구하고, 성불을 이루는 간절한 수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옛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송광사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한 질의 혈경(血經)은 이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될 것이다. 혈경은 말 그대로 사람의 피로 쓴 경전이다. 이 경전은 높이 36.4cm에, 길이가 1300cm의 병풍 형식으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권제 69이다. 70년대 연세대 명예교수인 서여(西餘) 민영규 교수가 송광사에 기증한 것으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붉은 색이 하얗게 탈색된 것으로 봐서 상당히 오래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송광사 박물관 관장 고경 스님은 “중국 사람이 썼다는 것 외에 어느 시대, 누가 제작했는지는 아직 연구가 미진해 밝히지 못했지만, 혀끝에서 피를 내 사경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중국에는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이 주석했던 구화산 화성사에 명나라 고승 무하 선사가 혀를 깨물어 썼다는 혈경(血經)이 보관돼 있으며, 나라 전역에 적지 않은 혈경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이 쓴 혈경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혈경의 전통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조선 초 금강산 마하연의 석하 스님이 10여 년간 혀의 피로 화엄경 80권을 사경을 주변에 보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던 혈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에 대한 최고의 찬탄이며, 공양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자신의 몸을 잊고, 법을 구했던 가장 숭고한 마음. 혈경 속에는 바로 이런 위법망구의 정신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쪽빛(감지)의 종이에 금·은을 사용, 사경을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던 세계 최고의 사경 국가였다. 이런 전통에 비춰보면, 조상들이 남긴 혈경이 현재 단 한 권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은 다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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