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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쟁론 16 - 남북조시대의 불교

기자명 박해당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중국적 특색 갖춘 독특한 불교 형성"

북조, '老子化胡說' 둘러싼 불교·도교 논쟁
남조, 불교·유교 '神滅不滅' 논쟁 치열

서력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동진(東晋)시대에 이르러 중국사상계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으며,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전통사상인 유교나 도교를 압도하면서, 중국적인 특색을 갖춘 전통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확고한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남북조시대에는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한족이 세운 남쪽의 왕조와 비한족계의 여러 종족들이 세운 북쪽의 왕조가 서로 대치하면서, 각각 단명한 왕조들이 서로 교체되며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북조의 불교는 《열반경》에 대한 높은 관심이라든가 구유식(舊唯識)계 논서에 대한 연구와 같은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나름의 특성을 지닌 전통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교단의 규모로 볼 때, 남조보다 북조의 불교가 훨씬 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唐)의 법림(法琳)이 지은 《변정론(辯正論)》에 의하면 남조의 유송(劉宋)에는 1,913개소의 사원과 36,000명의 승려가, 제(齊)에는 2,015개소의 사원과 32,500명의 승려가, 양(梁)에는 2,846개소의 사원과 82,700명의 승려가, 진(陳)에는 1,232개소의 사원과 3,200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위서(魏書)》 석노지(釋老志)와 양현지(楊衒之)가 지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의하면 477년 당시 북조 북위(北魏)의 수도 평성(平城)에는 100여개소의 사원과 2,000여명의 승려가, 전국적으로는 6,478개소의 사원과 77,258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북위 말엽에는 수도인 낙양에 1,367개소의 사원이, 전국적으로 30,000여개소의 사원에 200만명 정도의 승려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헤아려볼 수 있다.

북조에서는 운강(雲崗)이나 용문(龍門)의 경우에서 보듯이 대규모의 석굴을 파고, 그곳에 수 많은 불상들을 조성하였는데, 여기에 참여한 이들을 살펴보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망라하고 있다. 이는 지배계층인 문인들이 주도하였던 귀족적인 경향의 남조불교와는 달리 북조의 불교가 광범위한 대중적 신앙으로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교단과 정치권력의 관계에서 볼 때, 북조에서는 교단이 실질적으로 국가의 통제하에 있었던 데 비하여 남조에서는 세속권력의 지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북방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남북조시대를 연 북위(北魏 386-534)에서는 이미 396년에 감복조(監福曹 : 뒤에 昭玄司로 바뀜)라는 정부기구를 설치하고, 도인통(道人統 : 뒤에 沙門統으로 바뀜)을 수장으로 임명하여 승단에 대한 관리감독을 시행하였다. 이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북제(北齊)에서는 태상시(太常寺), 수(隋)에서는 홍려시(鴻ㅉ寺)의 지배 아래 교단이 예속되었다. 남조에서도 이와 비슷한 승정(僧正)이나 사문통이라는 직책이 있었지만, 그 지배력은 북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국가권력과 교단의 관계는 불교에 적대적인 세력의 대응양상에서도 차이를 나타내었다. 북조에서는 북위 무제(武帝)와 북주(北周) 무제에 의한 두 차례의 법난(法難)이 있었다. 북위 무제의 법난의 배후에는 도교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던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와 유교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재상 최호(崔浩)가 있었으며, 북주 무제의 법난에는 출세를 위하여 불교를 이용하였던 위원숭(衛元嵩)과 도사 장빈(張賓)의 책략이 작용하였다. 이들은 각기 도교와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강렬하게 비난하였으며, 마침내 국가권력의 힘을 빌어 불교탄압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고환(顧歡)이나 범진(范縝), 순제(荀濟)의 경우에서 보듯이 과격한 배불론(排佛論)은 남조에도 있었으며,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논쟁에서 그쳤을 뿐, 북조와 같은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탄압은 일어나지 않았다.

북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은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을 둘러싸고 벌어졌는데, 그 상대는 도교였다. '노자화호설'이란 도교의 성인인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붓다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는 주장으로서, 일찌기 후한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교도들은 이를 이용하여 불교에 대한 도교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불교도들이, 붓다의 세 제자가 중국에 와서 공자(孔子), 노자, 안회(顔回)가 되었다고 하는 '삼성화현설(三聖化現說)'을 내세워 '노자화호설'을 거짓으로 규정함으로써 이를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결국 520년 북위 효명제(孝明帝) 앞에서 승려 담무외(曇無畏)와 도사 강빈(姜斌)이 참석한 가운데 논쟁이 벌어졌으며, 효명제는 도교도들의 주장을 거짓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으로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으며, 마침내 북주 무제의 법난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격렬하게 계속 이어졌다.

남조에서도 도교와 불교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불교와 도교의 갈등이 심하게 나타났지만, 그 중요성으로 볼 때 '신멸불멸(神滅不滅)논쟁'을 넘어서지 못한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중국불교인들은 윤회의 주체로서 영원한 자아인 혼신(魂神)이 사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고 하는 '신불멸론(神不滅論)'을 주장하였다. 반면, 불교에 적대적이었던 유교지식인들은 중국 전통의 기일원론(氣一元論)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이를 비판하면서, 죽으면 기가 흩어져버리기 때문에 사후에도 남아있는 혼신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윤회나 삼세인과(三世因果)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를 둘러싼 논쟁이 불붙게 되었는데, 신불멸론을 옹호하였던 종병(宗炳), 정선지(鄭鮮之), 소자량(蕭子良)과 신멸론을 주장하였던 혜림(慧琳), 하승천(何承天), 범진 등에 의해 시대를 달리하며 계속 이어져, 남조불교의 가장 중요한 논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불교내적으로 볼 때, 북조에서는 다양한 가르침을 종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려는 교판(敎判)이 처음 등장하였고, 《십지경론(十地經論)》을 기반으로 하는 지론종(地論宗)과 담란(曇鸞)의 정토종, 그리고 보리달마의 선종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남조에서는 승랑(僧朗)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법랑(法朗)이 '성실론'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승조(僧肇)이래 끊겨있던 삼론종의 맥을 다시 이어, 뒷날 길장(吉藏)으로 하여금 이를 대성케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남북조의 불교는 경론에 대한 진지한 연구, 다른 전통과의 치열한 논쟁 등과 같은 공통의 기반 위에서 각기 나름의 특색을 지니는 전통을 형성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당대의 중국 불교가 화려한 황금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박해당/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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