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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 각성시키는 진실

기자명 장승석
지금 진실을 밝힌다며, 옷 로비 사건의 청문회에서 열을 올리고 있는 국회의원들의 속셈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진실 캐기는 명분일 뿐이고, 내년에 있을 선거의 예비 운동이 저렇게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만을 우리는 확인할 뿐이다. 이 속셈을 알아 차린 관객은 짜증을 참으면서까지 관람석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나의 재벌 기업이 국가와 국민의 경제에 어떠한 파탄을 초래할지 몰라 전전 긍긍하는 이 판국에, 국정의 현안이 여자들과 국회의원들 사이에 오가는 말싸움에 말려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한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최대의 현안인 양 시끄럽게 구는 언론이 우리를 짜증나게 한다. 마지 못해 얼추 보거나 듣게 되는 증언들은 우리를 더욱 짜증나게 만든다.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선서를 마친 증인들의 진실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므로,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더욱 모호하게 된다. 두 진실이 일치하지 않으면 어느 하나는 거짓이다. 여기서 진실과 거짓을 확연히 가리지 못하면 관중에게는 둘 모두 거짓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파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청문회의 증인, 질문하는 국회의원, 보고 듣는 국민이 모두 한동안 거짓의 안개 속에서 노닌 꼴이 된다. 이 같은 사태를 우리는 이미 몇 차례의 주요 청문회에서 겪은 바 있다. 이 안개는 거짓 자체로부터 진실을 스스로 각성할 때서야 비로소 걷힐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청문회에서 오고가는 말들은 원론적으로는 모두 거짓이다. 그것은 말이기 때문에 진실을 직접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말은 개념이고 관념이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과 자기의 생각이 뒤섞인 것이며, 바로 이 때문에 개념이나 관념은 진실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증인에게는 자기의 말이 진실일 수 있다. 객관적 사실에 뒤섞여 있는 자기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낼 경우에는, 듣는 사람에게는 거짓인 것이 말하는 사람에게는 진실이다. 이처럼 말은 진실과 거짓의 합성이라는 점에서, 원론적으로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일컫는 세속제란 이 같은 말을 가리킨다.

청문회에서 진실이라고 토로한 말들이 모두 세속제로서, 결국은 거짓이라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러한 말들을 모두 무시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세속제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이해함으로써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진리관이다.

일찍이 중국의 유명한 학승인 자은(慈恩) 대사는 "세(世)란 감추어 덮는 것으로서 부서지는 것을 의미하고, 속(俗)이란 드러내는 것으로서 세상의 흐름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풀이하여, 세속제를 은현제(隱顯諦)라고 표현했다. 이에 따르면 세속제란 진리를 감추는 것인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 은현제라는 말은 청문회의 증언에 적용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우리가 진실과 거짓을 오가며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세속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증언, 즉 증인의 말 자체가 진실 아니면 거짓을 직접 드러낸다는 것을 잣대로 삼아, 이 잣대에만 얽매여 있을 경우에, 우리는 결코 정작 필요한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다.

진실인 양 위장된 청문회의 말들은 그 자체로서 진실을 각성시키고 있다. 공직 사회에 부정이 횡행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근절되어야 한다는 진실, 우리 나라의 대기업가들의 사고 방식이 비뚤어져 있으므로 그것은 교정되어야 한다는 진실, 나아가 재벌 총수들의 운영 방식이나 사고도 달라져야 한다는 진실 등이다.

세속은 진실을 감추고 드러내는 역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순의 세계이기 때문에 부처와 보살이 출현할 수 있으며, 세속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청문회에서 증인들의 말이 진실을 드러낼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그 말들을 통해 진실을 각성하고, 이 진실을 보살로서 실현할 때, 세속은 진실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정승석/논설위원·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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