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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속의 육신회향.육신보시

기자명 이수찬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후 죽음과 관련한 자비실천행인 육신회향과이를 근거로 한 장기이식의 문제는 자연스러운 보살행이다. 불교에서 육신은 죽은 뒤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버리는 무상한 물질에불과하다.

불교의 장례법에 화장을 한다던가, 종종 고승들이 입적할때 의도적으로새나 짐승에게 육신보시를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석존의 본생담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들을 위해서도 눈을 떼어 주는가하면 생명자체를 주고 있는 이른바 사신의 보시 이야기가 흔하다.

그러나 불교의 육신공양은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육신보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보시행의 완성, 대자비의 실천, 무상정등각의성취이다. 즉 이 목표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육신보시가 강조되었다.

화엄경에 나타난 보살의 육신보시는 대수고정신과 결부시켜서 먼저 중생의괴로움을 제거해 주고, 그로 인하여 최고의 깨달음에 나아가게 해 준다는보살도 실천의 이정표인 것이다.

육신보시의 한 방법인 장기이식과 관련한 불교적 입장은 자기 중심의집착에의한 이기심에서 벗어나 지혜가 뒷받침되는 실천행이어야 한다는것이다. 초기경전인 아함경에서는 "죽음은 육체에서 체온과 의식이 떠나버린 하나의 `묘지에 버려진 나무토막'과 같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삶을 유지시켰던 호흡, 체온, 의식과 육체가 사라졌을때 남은 것은 오직하나, 생존시의 업뿐 이다.

따라서 불교적 입장에서 볼때 의식이 떠난 육신의 장기가 만일 누구에게주어져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하더라도 업력은 생기지 않는다.우리의 의식이 있었을 때 자의에 의해서 마음을 내었을 경우에라야만이선업은 만들어 지게 된다. 육신은 연기의 이법에 의한 일시적인 존재로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나'라는 것도 집착이나 애착할 것이 못된다.

올바른 연기적 관점에서 볼때 `나'와 `너' 그리고 `그것'은 모두 나와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허망한 육신을 남을 위해 제공하는 것은 이 연기의 이법을 몸소 실현하는 자비의 행위이다.

한편 이러한 보시를 받아 생명을 새롭게 회복한 이는 다른 사람보다감사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위해 더욱 많은 공덕을 실현하면서 살아가야한다.

무엇보다도 불교적 생명공양실천운동은 지혜의 뒷받침 속에서 철저히상을 떠난 보시행위로써 자리매김해야 한다. 즉 불교적 육신보시의 행위는생명윤리에 결부되는 베푸는 자와 받는 자가 각각 범하기 쉬운 불청정의모순을 벗어나 중생속에서의 보살도의 완성이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있다.

결국, 불교적 입장에서 장기기증이나 장기를 받아 괴로움으로부터 구원받는 다고 하는 모든 행위가 근본적으로 오온(색.수.상.행.식)이 다 공한 줄아는 차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면, 불교가 지향하고 있는 깨달음의세계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행위로 전락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보살행으로서의 생명공양실천운동은 연기의 이법의 체득-육신보시-대수고-자비의 완성-진속 불이-깨달음의 성취를 지향해 가는 운동인 것이다.


이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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